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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자 없는 성자 " 수월의 삶을 찾아"
    행복의 문 - 법문, 좋은글/○--고승열전 2007. 12. 3. 21:43
     

    1.<그림자 없는 성자 水月의 삶을 찾아>


    허기 진 사람들에게 주먹밥이 되어주고

    갈길 먼 사람들에게 신발이 되어주고

    아픈 사람들에게 자비의 손길이 되어준 수월!

    글자 한자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잠조차 내려놓은 밤사이로 깨달음이 찾아 왔다.

    생사를 요달(요달)하고서도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어

    간도 땅 소먹이 꾼이 되어 그의 본디 모습을 공양했다.


    모든 생명을 자비로 대하며

    이승을 다하는 그날까지 중생에게 바친

    그의 불가사이 한 삶이 여기 강물에 언뜻 내비친다.


       학고재 / 김진태 지음 <물속을 걸어가는 달>에서~


    2. 수월의 출가


      ◇ 수월 음관(水月 音觀, 1855~1928)스님은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하다 어떤 탁발승이 밤새

    해준 수행이야기를 듣고 감화되어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이야기하자 주인은 가죽신을

    하나주면서 그 신이 다 닳을 때가지 일해주기를 부탁하자 순박한 수월은 그 가죽신을 신고 두해를 더 보내고

    나서야 출가할 수 있었다.

      수월은 충청도 서산군 고북면 장요리 연암산 중턱에 있는 천장(天藏)암에 출가했다. (1882년) 이절은 바로

     근세 이 땅의 禪의 거장인 경허가 일년 석 달동안 보림(保任)수행을 한 곳이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불꽃같은 용맹정진으로 깨달음을 얻은 경허는 1880년 보림 수행하려고 천장암에 온 것이다.

    그 곳에는 경허(선우선사)스님의 친형인 태허 성원(太虛 性圓)스님이 주지로 홀어머니 박씨를 모시고 있는 절이었다. 

      수월은 글자를 몰랐다. 그래서 나무하고 방아만 찧었다. 수월은 천수경 외우기를 좋아했고 특히 대비주

    (신묘장구대다리니)를 밤낮으로 틈만 나면 외우고 또 외웠다. 수월이 천장암을 찾아 간지 1년 뒤 14살 어린

    동자가 왔다. 그가 뒤에 경허스님의 법제자가 되는 만공스님이다. 어린 만공은 경허가 써준 소개장을 가지고

    왔기에 그해 12월 8일 (부처님 성도일)에 사미계를 받고 이름을 월면이라 했다. 또 그 무렵 “천진도인(天眞道人)”

    으로 이름난 혜월(慧月)도 천장암에 왔다.  수월보다 혜월은 9살 아래였고, 만공은 16살 아래였다.

      이 세 걸출들을 경허의 세 달이라 한다.   

     

    ◇ 수월은 자비롭고 나무하는 일을 주로 했고, 혜월은 천진스럽고 밭일을 주로 했고, 만공은 속이 넓었으며

    공양주 노릇을 했다.



    3. “대비심 다라니”로 통달한 성자


    ◇ 수월이 천장암에 온지 세 해가 지났다. 수월의 나이 서른셋 되는 해까지  수월은 일하며

    오직 대비주를 외웠다. 수월이 방아를 찧던 어느 날 밤 천장암 주지인 태허스님이 늦게 일보고 자정이 되어서

    절에 왔는데, 그날따라 방아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몰래 방앗간을 지나나가 참으로 희한한 일을 보았다.

    방앗간 안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세어 나오고, 물은 세차게 물레방아에 떨어지고 있건만, 웬일인지 방앗공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자세히 가보니 방앗공이는 허공에 매달려 있고, 수월은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아기처럼 자고 있지 않은가?

    태허는 단숨에 달려들어 수월을 끌어냈다. 그러자 그 순간 방앗공이는 태산 같은 소리를 내며 쿵쿵소리를 내며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다음날 태허는 이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고 수월을 위해 사미 수계식을 열었다. 그래서 수월은 태허를 은사로

    음관(音觀)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음관은 거꾸로 하면 관음인 바 관음의 목소리인 “대비심다라니”란 뜻이다.

    음관이란 이름은 은사 태허가 “관음의 본디 모습을 밝게 본” 수월에게 준 최고의 찬사였던 것이다.  


    4. 방광(方光)


     수월이 사미계를 받던 그해 이레 동안 용맹정진을 했다. 수월은 이레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산처럼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대비주를 끊임없이 외웠다. “만일 이 수행으로 얻는 공덕이 있다면 모든 중생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남김없이 공양 올리리라.”이렇게 맹세하고 먹을 틈도, 쉴 틈도, 뒷간에 갈 틈도 없이 정진했다.

    그렇게 이레째 되던 날 밤, 아랫마을 장요리에서 “불이야!”하는 외침소리에 온 동네사람들이 불길을 잡기위해

    산으로 갔다.

      그런데, 그 불기둥은 다름 아닌 수월스님이 온몸으로 뿜어낸 빛이 아닌가? 수행자의 몸이나 성물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방광(放光)이라 한다. 이 방광에 대한 기록은 예로부터 수없이 많으며, 오늘날에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월스님의 경우 일생을 통해 수차례나 빛을 뿜어낸 일은 옛 기록에도 찾기가 쉽지 않다.

     

    천장암 방광이후 수월은 2가지 큰 신통을 얻었다. 하나는 수월이 병자에 손을 대면 병자가 병이 낫는 것과,

    또 한 번 보거나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수월은 병든 가난한 백성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5. 수월 38살의 나이에 금강산 제일선방 마하연의 조실이 되다.


       수월이 천장암에서 병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술을 펴다가 어느 날 금강산 마하연으로 갔다. 수월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산에 들어가 땔나무나 해 날랐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김성근 판서의 아내가 마하연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기를 기다리다가 용하다고 소문난 수월스님의 소식을 물어물어 전국을

     헤매다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몰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런데, 개울을 건너다가

     그 부인은 수월스님을 생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 명호를 지극 정성으로 외우기 시작하였고 삼매에

     들 정도였다. 얼마 후 신통하게도 병이 없어지게 되었다. 물론 수월은 그 때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 후 몇 년 후

     수월이 다시 마하연에 나타났을 때는 그의 신분이 탄로 나게 되었다. 그래서 마하연의 조실(선객을 지도하는

     스님으로, 절의 가장 큰 어른)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수월은 말이 없었다.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만 하고 밤에는

     절구통처럼 오도카니 앉아 온 밤을 밝혔다. 인사를 해도 대꾸도하는 법이 없었고, 쓸데없는 빈말에는 아예 돌아보

     지도 않았다. 수월의 삶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6. 돌 종이 우는 소식


      수월스님 나이 마흔 둘이 되던 1896년 지리산 감로동천(甘露洞天) 천은사(泉隱寺)와 상선암(上禪庵), 그리고

     우번대(牛飜臺)에서 지냈다.  특히 우번대에서는 “돌종이 우는 소식”을 수행자는 들어야한다. 우번대 앞에있는

     석종대(石鐘臺)에서 울려퍼지는 돌종소리를~

      우번대란 “소가 몸을 바꾼 자리”란 뜻이다. 우번대는 해발 천이삼백 미터쯤 되는 높은 곳에 잇는 작은

     암자이다. 수월은 홀로 가을 한 철을 생식을 하며 보냈다. 수월은 우번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십 일년이 지난

     1907년 수월이 오대산에 나타났다. 오대산은 문수 신앙의 성지이다. 문수신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사람은

     자장 율사이다. 수월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반년 남짓 머물렀다. 그리고는 20년이란 세월을 보림행을 하였다.


    7. 부처에게도 물들지 않는 수월의 보림행


      ◇ 수월이 보림행을 한 1907년부터 20년간은 일제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후 조선을 강압으로 강제합병 하여

    무단통치를 하던 시기이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일제의 압박을 못 이겨 북간도나 만주 또는 연해주로 갔다.

    이에 수월스님은 불모의 땅 간도에서, 법복을 벗어버리고 소치고, 농사일하며 푼푼히 모은 삯으로, 짚신을 만들어

    지친 조선 사람에게 주고, 한 덩이 주먹밥을 주어 배고픔을 달래게 해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고향을 떠나온 그들, 낯선 땅에 첫발을 들여놓은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두렵고 움 추려 들었을까?

    이 때 수월이 내놓은 짚신과 주먹밥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봄눈 녹듯 녹여서 밝고 희망찬 내일을 꿈꾸게 하기에

    넉넉했으리라!

      백두산 기슭 회막동에서 보여준 수월의 삶은 부처에게도 물들지 않는 참으로 맑디맑은 자비의 모습을 깨닫게 한다.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이나 부처님께 감사하라거나 부처님을 찬미하라는, 참으로 부질없는 말을 한 마디도 지껄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짚신을 삼는 자신이라는 세계도, 그것의 피안인 부처의 세계도 다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깨달은

    이에게는 온 몸뚱이가 깨달음의 눈이듯이, 자비로운 보살에게는 온 세상, 온 중생들이 자신의 몸뚱이와

    둘일 수 없다. 그래서 수월에게는 감사를 받을 나의 모습이나, 감사를 해야 할 너의 모습이 따로 발붙일 구석이

    없었다.


    8. 금쪽같은 수월의 법문


      ◇ 수월스님이 이 기간 중 백두산아래 동녕 현의 수분하라는 곳에서 6년간을 보냈다.

    수분하에 있는 화엄사라는 절에서 기거하며, 낮에는 품팔이하고 밤에는 한잠도 자지 않고, 짚신을 삼으며

    정진하고, 밤새워 삼은 짚신과 주먹밥을 가지고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 나가 드나드는 조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화엄사 젊은 주지는 날마다 술이나 담배를 즐기며 그렁저렁 살아가는데, 수월이 하는 일이 몹시

    거슬렸다. 그래서 늙은 노인네인 수월에게 욕설하고 행패를 부렸다. 그래도 수월은 여섯 해 동안 묵묵히 참고

    오직한 순간도 성내지 않고 지낸 것이다. 그러가 그 젊은 중은 6년째 되던 해 아편장수를 따라 가고, 수월스님도

    그 곳을 떠나 송림산으로 갔다. 


      ◇ 1925년 봄 독립운동을 하던 한 청년이 크게 다쳐서 화엄사 부근 마을에 몸져 누워있었다. 이때 한 스님이

    청년을 화엄사로 업고 갔다.  그리하여 수월이 이 사실을 알고 이레동안 치료를 해주었다. 이 청년은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수월에 대하여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 청년은 경남하동사람으로 두 살 아래인 청담과도

    가깝게 지낸 사이 이다.

      그래서 그는 수월과 헤어지던 날 수월에게서 금쪽같은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 “열심히 수행혀라. 이 공부하는 데는 다 쓸데없다. 오직 이 마음하나 비우면 그만인겨.

    세상에서 마음 비우는 일보담 더 어려운 게 없어. 또 참는 일보담 더 어려운 일도 없어~

    스님들과 동포들이 내게 이런 말을 가끔햐~ <스님은 그 고약하고 독한 나쁜 놈 밑에서  워째서 고렇게 여섯 해

    동안이나 갖은 욕을 얻어 먹음시러 살었냐?>고 내가 수분하에서 지낸 얘기를 들은 모양이여. 동네 사방에서 고렇게

    얘기를 들었내비여.

      그때 나는 내 도를 다 이루기 위해 여섯 해 동안 어떤 젊은 스님 밑에 있었던 겨. 그 젊은 스님이 내게 무신

    행패를 부리고 무신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나는 한 순간도 성내는 마음이 일지 않았어. 나는 그런 내 보림 생활이

    참으로 기쁘고 즐거웠던 겨. 그러니, 그 젊은 스님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스승이었단 말이여. 나는 그 사람 때문에

    내 보림을 이룬 셈이여.

      자네는 뒷날 꼭 중이 되고 말겨. 중이 되더라도 딴 생각하지 말고 아는 척 하지 말고, 어리석게 열심히 공부만

    혀라. 공부는 보림이 중요한 뱁이여.”

        ⇒ 여섯 해 동안이나 그런 생활을 이어가면서 오직한 순간도 화를 내지 않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수월스님~

       < 성냄 그 자체가 텅 비어버림은 성내는 마음을 참아 견디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서 떨어져 나온 거짓 나(ego)가 사라져버린, 그냥 그대로 아름다운 삶의 풍경이 아닌가?>

       <성냄이란 본디 없는 “거짓 나”를 절대라고 생각하고 참으로 있다고 보는 데서 오는

    삶의 질병인 셈이다. 일제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일으킨 전쟁도 이런 질병이 다수의 삶 속에 번져 일어난

    세상의 병리 현상과 같은 것이다.>    


     ◇ 그 청년은 몇 달 뒤 이 청년은 몽골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고, 해방 되는 해 고국 땅에 돌아와 충청도의 한

     작고 조용한 절에서 수행자들을 가르치다가 2000년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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