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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고보우의 원융불교
    행복의 문 - 법문, 좋은글/○--고승열전 2007. 12. 17. 12:59
     

    ◇ 태고보우의 생애 사상


      

       태고보우의 원융불교


      1. 태고보우의 생애


      가.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년)는 누구인가?


    . 태고보우 국사는 고려말 불교를 대표하는 선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전법 초조 종조. 중흥조로

     크게 추앙받고 있다. 특히  태고종의 종조로 추대되었다. 그는  고려 말 제종 포섭으로 단일종을 창수한 

     太古普愚國師이다.


      태고보우는 속성은 홍씨로 홍주사람으로 고려 말 13살에 가지산 선문의 양주 회암사에서 廣智선사를 은사로 출가한

    후 열 아홉 살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화두를 참구하였고, 스물여섯 살에 교종에 속하는 화엄선과에

    합격하였다.   서른여덟 살 때 無字화두로 大悟(큰 깨달음)하였다.

       후일 삼각산 태고암에 머물며, <태고암가>를 지었고, 원나라 연경에 가서

    임제(臨濟)의 18대 적손인 石屋 淸珙(석옥청옥)에게 <태고암가>를 보여주고서 인가를 받고, 도화를 크게 펴서 이름을

    떨쳤다.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고 불교계의 정화와 통합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그 당시 불교계가 사분오열 되어 백인백색의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구산선문을 통합하고, 선교의 일치를 주장

    하는 등 원융불교의 시석이 되었다. 

      ◇ 신라 말부터 당나라에서 유입되었던  禪門이 고려초기에 주로 중국 남종 선맥을 이은 九山禪門을 이루었고, 후일

    조계종이라는 종단으로 형성되었다.   고려 초기 교종이 득세하고 교려 문신들이 대거 활약하던 시기에는 선종이 큰

    힘을 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목우자 지눌이 수선사를 중심으로 중흥시킨 이후, 그의 법을 이은 혜담이 종풍을 떨친

    이래로 훌륭한 선사들이 배출되어 후기의 조계종을 매우 성하게 하였다.

       특히 무신집권시기에 선종이 크게 위세를 떨쳤으며, 공민왕대에 이르러 태고보우에 의하여 구산선문이 하나로 통합

    하게 된다.


     나. 태고보우의 생애


      (1) 수행오도기(修行悟道期)

     수행오도기란 출생으로부터 깨달음을 이루고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은 때까지 45년간의 구도기간을 말한다.

      태고보우는 고려 충렬왕 27년 (1301년) 음력 9월21일 경기도 양근군 대원리(지금의 양평군)에서 홍주(洪州) 홍(洪)씨

     연(延)과 모친 정(廷)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일륜(日輪)을 품는 태몽을 꾸고, 보우를 낳았는데,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준수하여 관상을 보는 이들은

    모두 법왕아(法王兒)라 불렀다. 

      13세 1313년 (충선왕 5년) 양주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선사를 은사로 축발득도(祝髮得度)했다. 太古는 法號이고, 법명은

     普愚이다.

      19세 충숙왕 6년 가지산림 총림에 방부를 들이고, “ 만법귀일 일귀하처 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를 참구했다.

      26세 교종에 속하는 화엄선과(華嚴選科)에 합격해 경전의 심오한 뜻을 공부하는 등 선교(禪敎)를 겸수한 수행자로서의

     위의를 갖추었다.

      30세 용문산 상원암을 참배하고 관음보살상 앞에서 십이대원을 세워 용맹정진 하였고, 33세 1333년(충숙왕 복위 2년)

     감로사(甘露寺)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7일간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쉬지 않고 용맹정진 하여 결국 첫 깨달음을 얻었다.

      37세 불각사(불각사)에서 원각경(圓覺經)을 보다가 “일체진멸 명위부동(一切盡滅 名爲不動)”이라는 구절에서 두 번째의

     깨달음을 얻었다.

      38세 전단원(암자)에서 안거수행에 들어가 조주(趙州)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다 세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이 때 비로소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성취하고 오도송을 읊었다.

       

       조주의 옛 늙은이가

       앉아서 일천 성인의 길을 끊고

       취모검을 얼굴에 들이댔으나

       온몸에 빈틈이 없네.


       조주고불노 좌단천성로 (趙州古佛老 坐斷千聖路)  

       취모적면제 통신무공규 (吹毛覿面提 通身無孔竅)  


       여우와 토끼는 자취가 없고

       몸을 뒤집어 사자가 나타났네.

       굳은 관문을 쳐부수니

       맑은 바람이 태고에 불어오네.

      

       호토절잠종 번신사라로 (狐兎絶潛蹤 翻身獅子路)

       타파뇌관후 청풍취태고 (打破牢關後 淸風吹太古)

     

      39세 소요산 백운산에 칩거 한편의 백운암가를 지었다. 보우는 견성을 이룬 후 활짝 갠 마음의 경계를 이 시를 통해

    흰구름. 산. 물과 함께 노래했다. 이때 원나라 승려 무극(無極)으로부터 중국선풍의 정황을 들었는데, 무극은 보우의

    경지에 감복을 받고 중국 호주 하무산 천호암에 주석하고 있는 임제종(臨濟宗)의 적손 석옥청공(石屋淸珙)을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 그러나 아직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아 삼각산 중흥사의 주지로 부임해서, 크게 중수하여 절 동쪽에 자그만 암자를

    지어 태고암(태고암)이라 이름 했다. 여기서 5년간 머무르며 그 유면한 태고암가(太古庵歌)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안정된

    생활과 마음 그리고 고매한 격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 <태고암가>는 보우의 선정세계(禪定世界)를 그대로 담아낸

    결정체로서 그의 활연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보살승단의 정체성과 실천이념/하춘생/엔타임 P105~108 참조)

      

      (2) 구경결택기(究竟決擇期)


      제 2기 구경결택기는 보우가 중국 원나라에 들어가 석옥청공(石屋淸珙)을 만나 심계(心契)를 얻고 볼모로 원나라에

    있던 공민왕과 인연 맺은 후 귀국하기까지 3년여 동안을 말한다.

      원나라 승려 무극으로부터 석옥청공을 만나라는 권유를 받은 지 6년 되던 1346년 세속나이 46세에 보우는 원나라로

    건너갔다. 그 때 그의 심경을 그의 어록에 잘 나타나 있다.

      “다만 또록또록하고 분명하여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계속하여라. 한결같아

    힘을 얻으면 곧 좋은 때가 있으려니, 지혜 없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말하지 말고 반드시 본색종사(本色宗師)를 만나

    은밀히 결택(決擇)하여라. 이것이 대장부로서 평생의 사업이다.  ”

      태고 보우는 선 수행에 있어서 “화두참구⇒ 깨침⇒ 본색종사⇒ 참문 구경결택”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수행방법을 일관

    되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태고 보우의 원대하고 심오한 경지를 듣고, 원나라 순황제는 그의 태자생일에 보우를 초청해 <반야경>을

    강설을 들었다. 원나라에 들어 온지 1년 만에 보우는 (1347년 7월 15일) 석옥청공을 만났다.

      이때 보우는 자신이 지은 <태고암가>를 바치니 이를 본 석옥청공이 보우가 큰 그릇임을 알고 크게 감탄하였다.

    또 보우는  석옥청공의 日用事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보우가 “지금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 외에 더

    일러주실 말씀이 있나이까?” 하고 말하자, 석옥청공이 “ 노승도 이와 같고 삼세제불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니라.” 말

    하고 그 신표(信表)로서 가사를 전해주며, “노승이 오늘에야 3백 근의 무거운 짐을 당신에게 넘겨주니 두 다리를 편히

    펴고 잘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석옥은 임제의 18대 법손이다.

     석옥에게서 법을 전해 받은 소식이 연경에 널리 퍼져 보우는 연경에 오자 황제와 대신들의 환대를 받았다. 

    곧 연경 영녕사(永寧寺)주지로 부임되었다.  

     이곳에서 연경에 볼모로 잡혀와 있던 고려세자 강릉대군(공민왕)이 보우를 보고 감탄하여 고려로 돌아가 보위에

    오르면 왕사로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3) 원융개혁기(圓融改革期)

      제3기 원융개혁기는 중국에서 귀국한 후 왕사와 국사를 역임하며, 구산원융(九山圓融)과 오교홍통(五敎弘通) 등

    불교교단의 개혁을 모색하다가 입적하기까지 대중교화와 불교중흥에 매진했던 시기를 말한다.  

      태고보우는 1348년에 영녕사 주지를 사임하고 선가(禪家)의 법규를 제시한 <백장청규(百丈淸規)>와 <치문경훈

    (緇門警訓)>을 소장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중흥사에서 여름안거를 마친 후 용문산 소설산암에서 농사 지으며 4년을 머물렀다. 이 소설산에서 여섯차례 20년간

     머물렀다.

      보우의 52세인 1352년 5월 공민왕이 즉위한 후 태고보우를 왕사로 예우하였다. 특히 태고 보우는 光明寺에 국가적

    기구로서 원융부를 설치하여 선교종문 사사(寺社)의 주지를 직접관장 했다. 

      이후 태고보우는 국정자문을 하고 교단의 원융홍통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65세 때 공민왕 왕후가 세상을

    하직하자 실의에 빠져있던 공민왕을 화엄종의 편조라는 승려가 보필하였고, 그가 환속하여 신돈이라 부르고 국정을

    좌지우지 했다.

      1368년 여름 68세에 신돈에 의해 속리산 법주사에 금고 되었다가 이듬에 3월 풀려나 소설암에 돌아왔다. 1371년

    공민왕 20년 7월 신돈이 처형되자 보우는 다시 국사로 책봉되었다. 또 81세 우왕 7년 국사로 다시 책봉되고, 83세에

    소설산으로 다시 돌아와 1382년 12월 문도들을 모아 다음과 같이 임종계를 보이고 열반에 들었다. <법랍 69세>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허무한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인생명야수포공)

       80여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팔십여년춘몽중)

       죽음에 다 달아 이제 가죽껍질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帒 (임종여금방피대)

       수레바퀴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일륜홍일하서봉) 


      2. 태고보우의 사상 

      

     보우의 종풍은 그가 선승이면서도 수행방법과 모든 사상을 하나로 회통하는 원융불교(圓融佛敎)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정혜(定慧)를 겸수(兼修)하고 이사(理事)가 무애(無碍)한 대승불교이념을 구현하는 성불도생

    (成佛度生)의 극치를 장엄하고 있다.

      


     (2) 원효의 회통불교 사상과 太古普愚의 圓融思想


       태고보우는 敎와 禪을 일치시켰고, 淨土와 禪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이 태고보우의 원융사상은 원효의

    회통불교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며, 이 원융사상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며 우리 태고종의 종풍이기도

    하다.

     

      보우는 비록 출가하였으나 부모님께 효도하였고, 속세에서 나라를 위해 國師로써 중책을 맡았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이는 보우가 출세간인 佛僧이면서도 세간을 버리지 않았고 또 세간에 출입

    하면서도 출세간에 철저했던 것이니 이는 원효의 無碍사상과 그 맥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태고보우의 원융사상은 元曉의 和諍思想을 계승한 것으로 敎와 禪, 生死와 涅槃, 世間과 出世間 등의 모든

    현상적 대립을 극복한 通佛敎적인 사상이다.


      그는 공민왕의 王師로서 그 당시 불교계가 사분오열 되어 백인백색의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九山禪門을

    통합하고, 선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등 그의 원융불교 사상을 실천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 원융사상은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인 통불교의 개념으로 맥을 이었다. 이 원융사상은 오늘날 불교

    뿐 만 아니라 분열된 정치, 사회, 문화, 종교, 교육 등 사회 제 분야의 극심한 분열과 혼란을 극복할 가장 유력한

    지도이념이라 할 수 있다.


    ◇ 참고도서

       보살승단의 정체성과 실천이념/하춘생/엔타임

       태고보우국사의 종지와 종풍그 수행법/사단법인 대륜불교

       한국불교사 / 김영태 / 경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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