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리의 맛 ~ 수행의 효과 >>
◇ 우리가 불교의 진리를 배우고 공부하더라도
머릿속으로 알고 이해하는 것 만으로서는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배운 바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설탕 맛이 어떠한지는
팔만대장경을 다 설해서 이야기한다고 해도
직접 설탕을 입에 넣어 맛보기 전까지는
설탕 맛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체득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불교 공부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경전의 말씀을 살펴봅니다.
◇ 보살은 그릇됨이 없는 설(設)과 그릇됨이 없는 법(法)에 머물러 말하는 것이 성실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그대로 수행하여 신(身). 구(口). 의(意)를 청정히 하고 온갖 잡염(雜染)을 떠난다.
- <화엄경(華嚴經)> -
◇ <질문>
“법계(法界=진리의 세계)는 한 모습이요, 부처의 체성(體性)에는 둘이 없다.(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진여(眞如)를 염(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온갖 선행(善行)을 닦아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대답>
“ 비유컨대 대마니보(大摩尼寶=보석)의 체성(體性)은 본래 청정하지만 흙에서 막 캐어 낸 광석(광석)에는 더러움이
끼어 있으므로, 설사 사람이 그 보배로서의 본성(本性)을 아무리 염(念)한다 해도, 적절한 방법에 의해 갖가지로 갈고
다듬지 않을 때는 끝내 청정해지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의 진여법(眞如法) 또한 그 체성은 공적(空寂). 청정하다해도, 그것으로 족할 수 없고, 적절한
방법에 의해 갖가지로 닦지 않는다면 역시 청정해지지는 않는 것이며, 더러움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여 온갖 것에
두루 미치고 있는 까닭에, 온갖 선행을 닦아 그것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온갖 선법(善法)을 수행한다면,
저절로 진여법(眞如法)을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기신론(起信論) -
◇ 불교를 믿고 공부하는 이유는
마음의 평안을 찾고 행복해 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과 행복은
가족이나 이웃이 고통 받고 있는데
자신만의 평안과 행복을 찾겠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한 이기심일 수 있습니다.
함께 반야용선을 타고
고해의 언덕을 건너
우리 모두 해탈의 길로 가야합니다.
부지런히 정진하고, 큰 자비심을 일으켜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길이
바로 함께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해탈입니다.
너와 나, 우리 모두 오순도순
이해하며 도우며, 평화롭게
행복하게 잘 사는 길이 바로
이화세계요, 불국정토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남광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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