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고 보우의 원융불교불교 공부/불교의 이해 (남광 리포트) 2007. 12. 5. 13:16
<제목 : 태고 보우의 원융불교>
1. 여말 교단 현황
(1) 고려 불교의 전후기 구분
고려시대의 불교는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며, 국가를 수호하려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가졌는데, 편의상 고려불교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때 전기는 山門이나 業으로 일컬어졌고, 후기에 오면서 宗이라는 이름을 많이 붙였다.
고려시대 종파의 명칭을 가장 먼저 宗으로 붙인 경우는 天台宗이다. 그런데 천태종이 성립되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는 고려 중기이다. 그래서 잠시 침체에 빠졌다가 了世에 의해 다시 중흥하던 시기로부터 고려불교의 후기라고 본다.
華嚴宗은 義天과 藥眞의 이후를 후기로 보고, 曹溪宗은 지눌(知訥)의 중흥과 혜담(慧湛)의 수선사(修禪社) 계승 이후를 후기로 본다. 또 慈恩宗과 그 밖의 종파는 종의 이름을 보인 이후부터 후기로 본다.
(2) 제 종파의 현황
가. 천태종
◇ 천태종의 성립은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이루어져 크게 교세를 떨쳤지만 오래지 않아 침체기에 이르렀다. 침체된 천태종을 부흥시킨 자가 圓妙國師 了世이다.
1) 요세(了世1163~1245)
요세는 속성이 徐씨이며, 영남 신번(新繁) 태생이다. 12세에 출가하여
강양(협천) 天樂寺 균정(均定)에게 득도하고, 天台교관을 공부하였다. 후일 교관을 통달하고,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고, 목우자(牧牛子) 지눌(知訥)함께
定慧社에서 修禪하였다. 그 후 月生山 藥師寺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요세는 해남산(전남 장흥)의 옛 萬德寺의 터에 크게 도장을 열었다. 또 고종 19년(1232년)에 普賢道場을 열고 白蓮社를 결성하여, 天台의 三昧儀에 의해 法華三昧를 닦고 정토왕생을 구하였다.
이곳에서 입적할 때까지 法華 한 부질, 준제주(准提呪) 1천번, 미타불호 1만성을 일목표로 하였다. 직접 득도시킨 제자가 38명, 백련사에 가입한 사부대중이 3백여 명이었다.
2) 천인(天因:1205~1248)
천인은 박씨이며, 燕山郡 사람이다. 요세의 제자이며, 송광산 혜담에게 가서 조계종 요령도 얻었다. 요세의 보현도장에서 관법수행을 하였고, 후일 요세에게서 천태교관을 전해 받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제자 원환(圓睆)에게 법을 전해주었다.
3) 천책(天頙:1206~?)
성은 申씨이며, 귀족 재상가의 출신으로 20세에 급제하여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다가 만덕사 백련사로 가서 출가하여 요세의 제자가 되었다. 만년에 요세의 뒤를 이어 國師가 되었다.
◇ 이밖에도 운묵(雲黙), 丁午, 의선(義旋), 神照, 조구(祖丘), 玄見 등이 천태종의 고승으로 수많이 배출되어 교화를 크게 이루어 대각국사 의하여 개립된 이후 고려일대를 통하여 천태종이 융성하였다.
나. 화엄종
화엄교학은 신라이래 고려일대를 통하여 禪은 물론 모든 불교 신행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조에 와서는 균여(균여)를 제외하고는 천태종에 비하여 저술활동이나 교화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1)징엄(澄嚴1090~1141)
징엄은 숙종의 제4왕자이다. 8세에 대각국사에게서 출가하였다. 16세에 僧統이되고, 인종 때 왕명에 의해 5敎都僧統이 되었으며, 흥왕사에 머물면서 종풍을 크게 떨쳤다.
징엄은 의천의 제자이므로 천태교학에도 밝았다.
2)종린(宗璘 1127~1179)
속성은 왕씨로 15세에 징엄에 의해서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예종 때 수좌가 되어 귀법사와 부석사 등에 머물면서 종풍을 선양하고 승통이 되었다.
3)교웅(敎雄1079~1153)
교웅은 속성은 康씨로 章山(경산)사람이다며, 12세에 귀법사 戒明에게 가서 출가하였다.
대각국사의 문인이며, 흥교사의 승통이었던 이기(理琦)의 제자이다. 화엄공부하여 승과에 합격하였고, 후일 화엄의 대가로 이름을 떨쳐 문하가 300여명에 달했다.
다. 曹溪宗
신라말 고려초기에 九山禪門을 형성시킨 南宗의 祖師禪이 天台宗 성립이후 당시 교단의 추세에 따라 조계종이라는 종단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구산선을 조계종이라고 하였는지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없다. 고려초기 활발하던 구산선문이 교종이 득세하고 교려 문신들이 대거 활약하던 시기에는 선종의 침체하였다. 그러다가 목우자 지눌이 수선사를 중심으로 중흥시킨 이후, 그의 법을 이은 혜담이 종풍을 떨친 이래로 훌륭한 선사들이 배출되어 후기의 조계종을 매우 성하게 하였다.
특히 무신집권시기에 선종이 크게 위세를 떨친 것은 불립문자를 주장하던 당시 선종과 무신들의 입장이 맞아 떨어진 역사적인 일이라 하겠다.
1) 혼원(混元1191~1271)
혼원은 이씨이며, 황해도 수안(遂安)출신이다. 13세에 출가하여 凡日의 雲孫인 종헌(宗軒)에게 득도되고 구족계를 받았다. 총명하여 崛山禪席의 으뜸이 되었다.
2) 천영(天英 1215~1286)
속성은 양(梁)씨이며 남원태생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조계산 혜담에게 득도되었고, 22세 禪選에서 上上科에 급제하였다. 후에 청진국사 여몽, 혼원에게 사사하여 法要를 깨우치고 도예를 크게 떨쳤다. 혼연을 이어 조계산 제5세가 되었다.
3) 일연(一然 1206~1289)
일연의 속성은 김씨이며, 章山(경산)에서 태어나 일찍이 출가하여 진전사
大雄에게 득도되고 구족계를 받았다. 講席과 禪林을 두루 찾아 명성을 떨쳤으며, 승과에 합격하고 후일 大禪師가 되었다. 일연은 여러 사암(禪月寺/吾魚寺/仁興寺/麟角寺(린각사) 등지에 있으면서, 널리 크게 교화하였다. 저술활동도 왕성하게 했으며 <偈頌雜著>3권외 수백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특히 불멸의 <삼국유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4) 충지(沖止1226~1282)
일찍이 등과하여 관명을 떨쳤으나, 29세 때 禪源寺로 가서 天英에게 득도되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김해 감로사에 머물면서 크게 교화를 떨쳤다.
후일 修禪寺에 들어가 천영의 뒤를 이어 조계산 제6세가 되었다.
5) 보우(普愚 1301~1382년)
속성은 홍씨이며, 충남 홍주출신이며, 13세에 출가하여, 檜嚴寺(회엄사) 廣智(광지)에게 득도하여, 수학 후 19세에 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하여 한 소식을 얻은 후 37세 無字를 참구하던 중 大悟하였다.
후일 삼각산 태고암에 머물며, <태고암가>를 지었고, 원나라 연경에 가서
<태고암가>를 보여주고 石屋 淸珙(석옥청옥)에게서 인가를 받고, 도화를 크게 펴서 이름을 떨쳤다.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다.
그는 그 당시 불교계가 사분오열 되어 백인백색의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구산선문을 통합하고, 선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등 원융불교의 시석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태고보우의 원융 불교에서 다루기로 한다.>
◇ 신라 말부터 당나라에서 유입되었던 禪門이 고려초기에 주로 중국 남종 선맥을 이은 九山禪門을 이루었고, 후일 조계종이라는 종단으로 형성되었다. 고려 초기 교종이 득세하고 교려 문신들이 대거 활약하던 시기에는 선종이 큰 힘을 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목우자 지눌이 수선사를 중심으로 중흥시킨 이후, 그의 법을 이은 혜담이 종풍을 떨친 이래로 훌륭한 선사들이 배출되어 후기의 조계종을 매우 성하게 하였다.
특히 무신집권시기에 선종이 크게 위세를 떨쳤으며, 공민왕대에 이르러 태고보우에 의하여 구산선문이 하나로 통합하게 된다.
다. 자은종(慈恩宗)
자은종은 유가업瑜伽業(唯識學)계통의 종파이나, 고려후기부터 조선 초까지 몇몇 고승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 하였다.
1) 혜영(惠永1228~1294)
속성이 강(康)씨이며, 문경 태생이다. 11세 南白月寺 沖然에게 가서 출가하여 17세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승과에 오른 뒤 여러 절(속리사/불국사/통도사/중흥사/유가사)로 옮겨 다니면서 교화를 하다가 후일 왕명에 의해 5교 都僧統이 되어 桐華寺에 있었고, 충열왕 20년(1294년) 입적하였다.
2) 미수(彌授1240~1327)
속성은 김씨이며, 善山사람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원흥사 종연에게 득도되고 구족계를 받고, 경론을 배웠다. 19세에 승과에 합격하고, 국녕사에 머물면서, 29세에 3중대사가 되었고, 특히 <유식론>에 일가견을 이루어 <唯識論> 主講이 되었다. 각종파의 권위자들이 미수의 <유식론> 강론을 배웠다.
후일 승통이 되었고,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면서 경론장소 92권을 찬술하였다.
2. 태고보우의 원융불교
(1) 태고보우의 생애와 사상
가.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년) 생애
. 태고보우 국사는 고려말 불교를 대표하는 선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전법 초조 종조. 중흥조로 크게 추앙받고 있다. 특히 태고종 종조는 고려 말 제종 포섭으로 단일종을 창수하신 太古普愚國師이다.
태고보우는 속성은 홍씨로 홍주사람으로 고려 말 13살에 가지산 선문의 양주 회암사에서 廣智선사를 은사로 출가한 후 열 아홉 살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화두를 참구하였고, 스물여섯 살에 교종에 속하는 화엄선과에 합격하였다. 서른여덟 살 때 無字화두로 大悟(큰 깨달음)하였다.
후일 삼각산 태고암에 머물며, <태고암가>를 지었고, 원나라 연경에 가서
임제(臨濟)의 18대 적손인 石屋 淸珙(석옥청옥)에게 <태고암가>를 보여주고서 인가를 받고, 도화를 크게 펴서 이름을 떨쳤다.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고 불교계의 정화와 통합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나. 태고보우의 사상
보우의 종풍은 그가 선승이면서도 수행방법과 모든 사상을 하나로 회통하는 원융불교(圓融佛敎)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정혜(定慧)를 겸수(兼修)하고 이사(理事)가 무애(無碍)한 대승불교이념을 구현하는 성불도생(成佛度生)의 극치를 장엄하고 있다.
(2) 원효의 회통불교 사상과 太古普愚의 圓融思想
태고보우는 敎와 禪을 일치시켰고, 淨土와 禪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이 태고보우의 원융사상은 원효의 회통불교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며, 이 원융사상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며 우리 태고종의 종풍이기도하다.
보우는 비록 출가하였으나 부모님께 효도하였고, 속세에서 나라를 위해 國師로써 중책을 맡았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이는 보우가 출세간인 佛僧이면서도 세간을 버리지 않았고 또 세간에 출입하면서도 출세간에 철저했던 것이니 이는 원효의 無碍사상과 그 맥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태고보우의 원융사상은 元曉의 和諍思想을 계승한 것으로 敎와 禪, 生死와 涅槃, 世間과 出世間 등의 모든 현상적 대립을 극복한 通佛敎적인 사상이다.
그는 공민왕의 王師로서 그 당시 불교계가 사분오열 되어 백인백색의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九山禪門을 통합하고, 선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등 그의 원융불교 사상을 실천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 원융사상은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인 통불교의 개념으로 맥을 이었다. 이 원융사상은 오늘날 불교 뿐 만 아니라 분열된 정치, 사회, 문화, 종교, 교육 등 사회 제 분야의 극심한 분열과 혼란을 극복할 가장 유력한 지도이념이라 할 수 있다.
'불교 공부 > 불교의 이해 (남광 리포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관사상의 개요 (0) 2007.12.05 선불교의 유입과 구산선문의 성립 (0) 2007.12.05 밀교의 성립과 밀교의 사상 (0) 2007.12.05 밀교성립의 사상적 배경 (0) 2007.12.05 밀교의 이해 (0) 2007.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