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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생애와 회통불교불교 공부/불교의 이해 (남광 리포트) 2007. 12. 5. 10:45
◇ 목차
1. 서언
가. 개념의 정의와 주제선정 당위성
(1) 한국불교의 특징과 원효 (2) 원효의 중심사상
나. 연구목적과 방법, 범위
2. 본론 1
가. 통일기 불교의 역사적 고찰
(1) 통일이전의 불교계 상황
가)가야불교 나)고구려불교 다)백제불교 라)신라불교
마)통일전후 신라고승들의 삶
(2) 통일이후의 불교계 상황
가) 통일시대 불교의 특성과 민족불교의 완성
나) 통일시대 불교의 전성기 다) 통일시대 불교의 침체기
나. 원효 연구와 회통불교
(1) 원효의 생애과 사상 (2) 원효의 회통불교
(3) 원효의 회통불교 사상과 太古普愚의 圓融思想
3. 본론 2 (원효의 가르침과 대승보살의 길)
4. 맺는말
5. 참고 문헌 색인
1.서언
가. 개념의 정의와 주제선정 당위성
(1) 한국불교의 특징과 元曉
오늘날 한국불교에는 수많은 불교 종파가 있으나 대체로, 그 뿌리는 보살도를 강조하고 있는 대승불교이다. 그래서 한국불교의 특징은 한마디로 通佛敎라 할 수 있다. 통불교란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불교전반에 통하는 교리를 말한다. (주1) <불교사전/운허 용하지음/ 동국역경원 P888 상단 참조>
이 通佛敎의 연원은 바로 會通佛敎를 주창한 신라 원효스님에 있다. 원효스님이 생존하였던 당시에 신라에는 1백 명이 넘는 대사상가들(百家)이 있어 서로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하여 국론이 격렬하게 분열되고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주2)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8 상단 참조>
원효는 一心이라는 더 넓고 큰마음을 가지고 모든 주장과 주의를 다 받아 들였다. 마치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 거울이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제자백가의 주장을 다 받아 들였다.
(주3)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8 중단 참조>
(2) 원효의 중심사상
원효의 중심사상은 한마디로 “和諍會通” 곧 和會를 통한 한 마음(一佛心,一心)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불교안의 諸家 異諍을 和解하고 經敎諸說을 회통하여 하나의 부처님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주4) <한국불교사/김영태 지음/경서원 P100 중단 참조>
그러므로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인 통불교를 이해하려면, 먼저 원효의 “和諍會通”을 연구해 보아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하여 당연히 원효에 대한 탐색은 물론 원효가 살았던 삼국시대와 통일시대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 연구목적과 방법, 범위
(1) 연구목적
오늘날 우리나라의 불교의 특징인 통불교 개념을 이해하고, 대승보살도의 길을 바르게 잘 가고자 본고에서는 역사 속에서 원효 탐색과 그 시대의 불교 상황을 연구하고자한다.
(2) 연구방법
연구 방법은 역사서와 논서 및 원효 관련 서적, 강의내용들을 정리하여 연구목적과 타당한 결과를 추론하고자 한다.
2. 본론 1
가. 통일기 불교의 역사적 고찰
(1) 통일이전의 불교계상황
신라의 삼국 통일은 통일이전의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치, 사회, 종교, 문화 등 제 분야에 걸쳐서 영향을 받았다. 불교도 교학에 있어서 고구려의 삼론종, 열반종, 천태종과 백제의 율종과 많은 고승 대덕이 통일신라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원효스님은 통일전 수많은 불교 각파의 경률론을 깊이 연구하였고, 천태, 법화, 화엄, 삼론, 열반 등의 교학을 두루 통달하고, 그 당시 백가이쟁으로 분열된 정치, 사회, 종교, 문화 등을 一心으로 和諍會通을 하기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통일이후 그는 왕권과 귀족들에 의하여 희생된 민초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위하여 아미타불 신앙을 보급하고 스스로 無碍行을 실천하였다. (주5)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24~29 참조>
가) 가락국불교
가락국의 불교 전래는 기원후 48년 김수로왕(AD42~199년)때 인도 아유타국의 허왕후(허황옥)과 장유화상(허보옥)이 가락국에 귀화하면서이다. 이때 석탑과 불교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로왕의 10남 2녀중 7남이 신선도 수행을 하였고, 지리산에서 2년간 수행하여 칠불암을 건립(AD101~103년)하였다. 가락국시대에 건립된 절로서 <만어사, 장유사, 칠불암, 서림사 등이 있다.
따라서 가락국은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직접 인도나 남방에서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주6) <한국불교사/김영태 지음/경서원 P70 중단 참조>
또한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됨으로서 가락국의 남방불교가 신라에 자동 흡수되게 되었다.
나) 고구려불교
고구려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문헌상 기록상으로 볼 때 기원후 372년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2년이다. 이 때 중국 前秦王 符堅(부견)이 사신과 順道스님으로 하여금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그 후 소수림왕 4년에는 阿道스님이 왔다. 구국원왕 원년(391년)에는 칙령 崇信佛法求福을 내렸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보호하고 발전시켰다. 광개토대왕 때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건립하였다.
◇ 고구려의 고승들
- 구법승 승랑(僧朗)은 장수왕(413~491년)대에 중국 攝山으로 가서 삼론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승랑은 삼론의 대가가 된후 중국에서 攝山승랑 또는 섭령(攝嶺)이라 불리고 중국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삼론종:인도 대승불교의 중관계에서 시작되어 중국에서 크게 발달하였다. 용수가 지은 中論, 十二門論과 메바가 지은 백론의 3부를 주요경전으로 함)
- 혜관(慧灌)은 27 대 영류왕 8년(6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삼론종을 펴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주7) <한국불교사/김영태 지음/경서원 P36 상단 참조>
- 보덕(普德)화상은 보장왕 때 불교가 도교의 득세로 탄압을 받자 백제 완산(전주) 고대산으로 가서 열반종을 전했다. 이후 신라 원효와 의상이 보덕의 가르침을 받았다.
다) 백제불교
기원후 384년 백제 14대 침류왕 원년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으로부터 법성포에 도착하였는데, 침류왕이 친히 마중을 나갔다. 또 아신왕 (392년)때 칙령 崇信佛法求福을 내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백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보호하고 발전시킨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시대 고승인 謙益(겸익: 백제 율종의 시조)은 26대 성왕4년(526년) 인도에서 돌아와 범본 율부를 번역하였다. 玄光(현광: 법화신앙을 보급 )는 중국 남조인 陳에서 南岳 慧思(514~577)로부터 화엄경의 <安樂行>법문을 전수 받아 수행정진하여 法華三昧를 증득하였다.
. ◇ 백제불교 일본에 전래
-위덕왕 35년(595년) 혜총(惠聰)이 도일하여 불사리를 전하고, 후일 일본 成德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30대 무왕 3년 관륵(觀勒)이 삼론을 전하고 일본 최초의 僧正이 되었다.
- 의자왕 15년(655년) 비구니 법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유마경>을 독송하여 병자를 고쳤다. 그 후 일본에서 유마회가 성행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라) 신라불교(통일전)
통일 전 신라의 귀족들의 힘은 강대하여 왕권이 미약하였으며, 이때 귀족들은 토속신앙을 가지고 있어 처음에는 불교를 배척하였다. 신라 23대 법흥왕 14년(527)년에 이차돈의 순교 후 불교가 국교로 공인되었다. 이것은 법흥왕이 귀족들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왕권 통치강화를 위한 명분으로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게 한 것이다.
불교공인 이전에 고구려를 통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는데, 13대 미리왕 2년(263년)고구려 승려 我道가, 19대 눌지왕 때(417~458)는 墨胡子가, 23대 법흥왕 때는 阿道화상이 신라에 와서 불교를 전했다.
마) 통일 전후 신라 고승들의 삶
원효 이전 신라불교학은 이미 높은 수준에 달해 있었다. 열반학의 대가인 보덕(寶德)이나 삼론학의 대가인 승랑(僧朗) 등이 고구려인으로서 이미 동아시아에서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백제에서는 율학을 정립한 겸익(謙益)과 담욱(曇旭), 혜인(惠仁) 등이 범본에 의거해 소승율학에 근거를 둔 新律의 체계를 세웠다. 신라에서는 圓光, 安含, 慈藏, 朗智, 惠宿, 惠空, 大安 등의 고승들은 불교연구와 불교인식에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와 같은 통일전후 삼국시대의 높은 수준의 불교사상은 후에 원효에 의해 통불교로 융합되게 된다.
1) 원광 : 가려서 살려주어야 한다.
원광법사(532~630)는 진평왕 11년(589년) 중국으로 유학하여 600년에 귀국하였고, 국왕으로부터 성인의 예우를 받았다. 원광법사는 대승법문을 펼쳤으며, 세속오계는 삼국통일시 신라화랑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불교관은 황실귀족불교, 호국불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다.
(주8) <한국불교사/김영태 지음/경서원 P60 상단 참조>
원광은 국사로 중용되어 世俗五戒를 강조하였다. 세속오계는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有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을 말한다. 이것은 忠. 孝. 信. 勇. 仁라는 5가지 덕목을 당시의 국민들에게 당부한 것이며. 후일 신라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세속오계 중에서 仁을 나타내는 다섯 번째 계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중리라.”라는 것이다. 원광법사가 이것을 계로 넣은 이유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가진 것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는데, 이때는 함부로 죽이지 말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가려서 죽여라는 것이다.
원광법사의 이러한 생각은 불교 삼장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안목에서 나온 여유 있고 넉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넉넉한 마음은 원효에 이어지게 되었다.
(주9)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41 상단 참조>
2) 자장 : 부처님나라 만들기
자장율사(608~677?)는 신라왕족(진골) 출신인 승려로 선덕왕 5년(636년) 당나라 중국 유학하여 청량(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와 황룡사에 9층 석탑을 세웠다. 자장율사는 중국에서 크게 교화를 떨쳤고, 본국에 와서 호법호국의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자장이 당나라에 머물면서(638~643) 神人을 만난 것은 이후 신라의 佛緣國土사상 전개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또 오대산에서 현신한 文殊菩薩을 친견한 것은 이후 신라 오대산 신앙의 실마리가 되었다.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신라는 대 백제방어전초기지인 대야성이 백제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낙동강 유역까지 후퇴할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때 자장이
당에서 돌아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의식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 왕에게 주청하여 불교를 중심으로 한 정치를 제시하였다.
자장은 대국통에 취임하여 황룡사 9층 석탑을 세운 것이 그 대표적 예이며, 이것은 불교치국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되는 “부처님 나라 만들기”로 구체화된다. 자장은 가섭불 신앙과 신라과거불국토사상을 제창하여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이 통일되기를 불전에 염원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라인들이 지닌 높은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결론적으로 자장이 지배층을 중심의 불교를 지향했다면, 혜숙, 혜공, 대안, 원효, 의상 등은 일반 서민 중심의 불교를 지향한 점이 대비되는 것이다.
3) 낭지/ 보덕 : 원효의 길라잡이
원효는 특정한 스승을 정해서 배우지 않았으며(學不從師) 깨달음의 오처(奧處)를 스스로 터득(自悟)했다. 그러나 그를 이끌어준 스승들은 많이 있었다. 낭지와 보덕 그리고 혜공과 대안 등은 그의 토론자이자 스승들이었다.
◇ 朗智(낭지)는 울주 영취산에 머물면서 <법화경>을 강의했으며, <화엄경>에도 밝았다. 원효의 사미시절 영취산 반고사(磻高寺)에 머물면서 반고에게 佛學의 의문점을 묻고 토론했다. 특히 “초장관문(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은 낭지의 교시를 받고 지은 것이다.
◇ 普德(보덕)은 원래 고구려 고승이었다. 보장왕의 도교 홍시(홍시)정책을 보고 실망하여 650년 완산주 고대산(전주 고달산)으로 가서 景福寺라는 절을 지어 <열반경>과 <방등경>을 강의 했다. 원효도 그곳에서 보덕의 가르침을 받았다.
4) 혜숙/혜공/대안 : 벌거숭이 인간의 모습
신라불교 대중화의 선구자는 진평왕(579~632) 때 고승 혜숙과 혜공이다. 통일전 신라불교는 왕실중심의 귀족불교의 형태가 강했는데, 혜숙(惠宿)은 농촌에서 전법활동을 하였고,/혜공(惠空)은 삼태기를 걸치고 길거리에서 대중교화에 힘썼고 / 大安스남도 하층민과 호흡을 같이한 원효스님의 스승이 었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삶을 산 혜공과 혜숙 그리고 대안은 허위와 가식의 포장 속에 갇혀버린 그 시대의 귀족들과 승려들에게 참다운 인간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미 業의 習氣에 의해 훈습(薰習)된 현실적인 인간들은 이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서도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업의 습기의 그물에 덜 걸린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투영되어있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고 곧바로 부처의 가르침에 귀의하였다.
(주10)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47 하단 참조>
◇ 혜숙(惠宿)
혜숙은 귀족들과 함께 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한 삶인가? 를 보여주었다. 그는 귀족불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서민들의 삶 속에로 온몸을 던지는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하여 我想과 我執의 거물에 걸려 발버둥치는 그 당시의 귀족 승려들의 삶을 일깨워 주었다.
시골을 중심으로 전개한 그의 자유자재한 삶의 흔적은 서민 속에 불교를 깊이 심는 계기가 되었다.
◇ 혜공(惠空)
혜공은 신라 선덕왕 때 귀족 天眞公의 집에 고용살이하던 노파의 아들이었다. 후에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천진공의 스승이 되었다. 혜공은
조그만 암자(夫蓋寺)에 있으면서 삼태기를 지고 취해 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므로 부궤화상(負簣和尙)이라고 불렀다
(주11) 불교사전/ 운허용하 지음/ 동국역경원 / P941참조)
. 만연에 항하사에 있으면서 원효가 經疏를 지을 때 서로 문답하고 하였다. 그의 삶의 역정은 원효의 스승이자 선배 그리고 절친한 도반으로서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혜공은 나무꾼과 소치는 아이들 그리고 농부들이 즐겨 쓰는 삼태기를 등에 지고 다니거나, 술 취하여 노래와 춤을 불렀던 것은 모두 이 티끌세상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자[同塵동진]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계층의 경계를 넘어선 참다운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주12)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48 하단 참조>
◇ 대안(大安)
신라 최고의 지위를 누린 원광법사와 사형사제하며, 왕년에는 신라 불교를 이끌었던 <원공>스님이다. 그 당시 신라의 불교가 너무 왕실과 밀착하여 백성들을 외면한 데 환멸을 느끼고~ 절간을 떠나 자취를 감추고 늙은 걸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주13) 고승열전 원효대사/윤청광 지음/우리출판사/P23하단
대안은 혜숙이나 혜공에 못지않은 식견과 삶의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장터거리에 살면서 동발(동발)을 두드리고 “大安! 大安!”하고 외치고 다녔다.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금강삼매경>의 차례를 꿰어 맞추어 철봉(綴縫)하라는 왕명을 받고도 왕궁으로 들지 않고 경전을 가져오게 하여 시장바닥에서
순서를 맞추었다. 또 그 해석은 원효만이 할 수 있다고 왕에게 이야기하여 원효로하여금 <금강삼매경소>를 짓게 하고 강설하게 한 장본인이다.
그는 항상 서민들과 애환을 같이하며 “무소유와 무집착”의 삶을 몸소 실천했다.
◇ 인간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혜숙과 혜공 그리고 대안의 모습은 분황사의 묵향(墨香)에 젖어 있는 원효에게 엄청난 울림으로 다가왔다. 원효의 인식전환(깨달음의 단초)은 바로 이들의 삶을 통해서 비로소
무애(無碍)의 실천행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14)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50 하단 참조>
(2) 통일이후의 불교계 상황
가) 통일시대 불교의 특성과 민족불교의 완성
삼국통일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왕실보호, 호국불교로 국가적 지원을 바탕으로 크게 발달하였다. 삼국통일이 된 후에는 불교대중화는 물론 교학연구를 더욱 깊이하여 불교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웠다.
신라통일기의 불교는 삼국시대의 연장인 동시에 그것을 더욱 융합 총화하여 창의적인 민족불교를 이룩하였다.
통일기의 신라불교의 성격은 왕실귀족을 중심한 국가적 불교가 서민 대중화되어서 다시, 고구려와 백제의 오랜 역사를 거쳐 온 불교와 합하여 민족불교를 형성할 수 있었다.
나) 통일시대 불교의 전성기
통일시대의 불교의 전성기는 30대 문무왕(661~681)부터 36대 혜공왕(765~765)이며, 최고의 극치점은 경덕왕(742~765)이다.
이 시기에는 교학연구와 실천교화 등 불교의 모든 방면에서 극성을 이루어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빛난 황금시대이다.
1) 호국불교와 통일완수
◇ 文武王의 崇佛 護國
제30대 문무왕(661~681)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문무왕은 호국불교와 숭불사상이 철저한 왕으로 그는 사후에 유언에서 불교식장례인 화장, 불교의 전륜성왕과 같이 과세를 낮추고,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라고 하였다. 또 그는 죽어서도 동해바다의 호국용이 되길 발원하여 수중왕릉을 만들도록 하였다.
◇ 김유신의 信佛力
삼국통일의 주역인 金庾信(595·~ 673)장군은 철저한 信佛者였다. 그는 15세에 화랑이 되었을 때 그 단체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 하였다. 龍華는 미륵을 가리키고, 香徒는 부처님 앞에 향불을 사르는 무리라는 뜻이다.
유신은 17세 때 나라를 위한 기도 중 삼매에 들어 難勝노인(난승보살=도솔천왕) 을 만나 그의 보검에 신력을 받아 그 힘으로 나라를 구하고 결국 삼국을 통일성업을 완수한 것이다. 그는 철저한 호국불교의 신봉자였던 것이다. 후일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뒤 취선사(鷲仙寺)라는 절을 세웠다.
2) 교학연구와 교화고승
◇ 원효 : 무소유와 무애의 자유인 원효스님
원효는 신라 육두품 출신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하고 조부의 손에서 자라났다. 후에 흥륜사 법장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는데 그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출가 후 원효는 많은 스승을 두었는데, 영취산 반고사 朗智법사, 전주 고대산 보덕화상, 大安대사 등이며, 그는 당대에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거의 모든 불교의 종파 의 진수를 터득하였다. 즉 천태, 법화, 화엄, 율학, 열반종 등 경서에 통달하였다.
그러므로 원효는 한 스승을 고집하지 않고 크나큰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그 모든 주의 주장이나 사상을 다 담았던 것이었다.
원효는 오천년의 한국 역사상 가장 빼어난 사상가였다. 그의 학문적 화두는 다양한 주장을 회통하고 화해시키는 것인데, 일심을 통해 모든 것을 회통하였던 것이었다. 원효는 신라당시의 1백여 명의 대사상가들[百家]을 총섭한 그 정점에 자리하였다. 이러한 바탕 하에 그는 금강삼매경론(소) 등 수많은 저술을 완성 하였다.
그는 沙門 원효를 벗어나 , 수행의 높은 단계를 이미 완성하고 無我 보살행을 몸소 펼쳤던 것이었고, 중생을 풍요롭게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온 몸으로 자비행을 실천한 무소유와 무애의 자유인 이었다.
(주15) < 원효탐색 /고 영섭 지음/연기사 7~8P 참조>
◇ 의상 : ~우리나라 불교 華嚴宗 開祖~
義湘大師(625~702년) 속성은 김씨다. 2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
우리나라에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는, 원효대사와 더불어 신라불교의
대표적인 스님으로 꼽힌다. 의상대사는 처음에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구법의 길을 떠났다가 요동지방에서 고구려 순찰병에게 붙잡혀 있다 돌아 온 뒤, 661년 다시 혼자서 당나라 사신의 배를 간신히 얻어 타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의상스님은 662년 당시 당나라 화엄의 대가였던 智儼화상을 종남산 지상사로 찾아가 그 문하에서 공부하여 인가를 받아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지엄화상이 입적한 후에 그의 뒤를 이어 문하생들을 지도하다가,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676년(신라 문무왕16년) 급히 신라로 돌아와 태백산 아래에 부석사(부석사)를 세우고 <화엄경>을 강론하였다.
의상대사를 죽어서라도 따르고자 했던 선묘낭자와의 인연이 훗날 안타깝고도 아름다운 선묘설화를 낳아 아직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중국 화엄 본찰인 지상사의 법장대사까지도 의상대사를 큰 스승으로 존중할 정도였으며, 전국 10여 곳에 화엄종의 사찰을 건립해 부처님의 화엄경이 이 땅에 고루 전해지도록 했다.
(홍전, 태백산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등~)
저술로는 오늘날 까지 전해오는 <화엄일승법계도>와 <아미타경의기>
<백화도량 발원문>등이 있으며, 스님 세속나이 77세이던 서기 702년 초겨울 입적하였다. (주16) <고승열전 의상대사 /윤 청광 지음/우리출판사 서문 참조>
◇ 경흥
憬興은 神文王 때(682~692년)의 고승으로 그 학덕과 도예(道譽)가 일세에 떨쳤다. 울주군 웅천사람으로 18세에 출가하여 삼장을 모두 통달하였다. 그는 저술활동을 활발히 하여 법화경소 16권을 비롯하여 40여 가지의 저술을 하였으며, 신라 3대 저술가이다.
◇ 태현
경덕왕 때(724~764)의 고승으로 당에서 이름을 떨친 원측의 제자인 도증(道證)의 제자이다. 원효, 경흥과 더불어 신라 3대 저술가의 한 사람으로 법화경고적기(古迹記) 4권을 비롯하여 52여 가지의 저술을 하였다.
3) 교법실천 대중교화 고승
◇ 명랑
明朗은 선덕왕 때 사람으로 신라귀족 출신(慈藏의 외생질)으로 일찍이 당나라에 구법하고 돌아왔다. 통일전인 635년에 귀국했다. 문무왕 13년(673년) 四天王寺를 개창하고, 또 金光寺(金剛寺) 등을 창건하였다. 명랑은 文豆婁(문두루mudra神印)의 비법으로써 국난을 방지하였다. 이 계통은 고려대까지 계승되었다. 신인종(神印宗)의 조사로 추앙됨.
◇ 진표
眞表는 景德王 때(742~765)의 고승으로 완산주 만경현 사람이다. 12세때 金山寺 順濟를 은사로 득도하였다. 특히 그는 참회법을 지극히 수행하여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가피를 입었다. 그 후 占察經과 189개 간자(簡字)로서 占察敎(戒)法을 크게 일으켰다. 그는 금산사, 吉祥寺 등지를 중심으로 널리 중생교화에 힘썼다. 그의 문하에 永深(영심)을 비롯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고, 그 특징은 참회불교라 할수 있는 교법을 널리 폈다.
◇ 혜통, 의림, 혜일: 대승불교의 꽃 密敎의 傳法僧
慧通은 당에서 구법하고 돌아와 밀교를 전했다. 당에 가서 인도의 고승 선무외(善無畏)에게 밀교의 진의를 받아 귀국했다.
義林(703~?)은 善無畏(637~735)와 金剛智(669~741) 등에 의하여 중국의 밀교가 이루어진 다음에 본격적인 밀교교법을 신라에 전한 스님이다.
慧日은 선덕왕 2년(781년) 입당하여 청룡사 혜과에게서 태장계와 금강계 등 밀교 교전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 밀교교법을 널리 폈다.
다) 통일시대 불교의 침체기
통일시대의 불교의 전성기는 30대 문무왕대 부터 36대 혜공왕대 까지이며, 이 시기에는 교학연구와 실천교화 등 불교의 모든 방면에서 극치를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제 35대 경덕왕대(742~764)에 이르기까지 전성기의 극치를 보이던 불교가 그 후 차츰 침체되어갔다.
통일 후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신라는 통일기 전후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사회 등 제 분야에 걸쳐 진취적이고 역동적이던 열성이 식고, 타성에 젖어 부패하여 결국 쇠락의 길로 나가게 되었다.
모든 것이 극에 달하면 쇠하는 이치가 불교역사에도 어김없이 적용된 셈이었다. 이렇게 침체되어가던 통일신라 말기에 새로운 불교의 풍조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禪佛敎였다. 이 禪風은 중국에서 보제달마 이래 종풍이 확립되어 선종으로 성립 발전된 것이다. 이 선종은 중국의 선종 6조 혜능(혜능:638~713)에 이르러 南頓禪(남돈선: 惠能/ 南宗)과 北漸禪(북점선: 神秀/ 北宗)으로 나누어지면서 그 기세가 극성할 무렵 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국에서 선법을 배워왔다.
1) 北宗의 전래
- 법랑(法朗)은 중국 선종의 제4조 도신(道信:580~651)이 禪法을 배워왔다.
- 신행(神行: 704~779)은 법랑에게서 선법을 배웠고, 당에 건너가 神秀(~706) 의 제자인 보적(普寂)의 門人 志空으로부터 北宗 禪法을 배웠다. 그러나 이 선법은
遵範(준범)을 거쳐 道憲에 이르렀고 또 다수의 제자가 배출되었지만 후에 전래된 남종선에 의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2) 南宗의 전래
◇ 도의는 37대 憲德王 5년(784)에 唐에 가서 馬祖 道一의 제자 西堂 智藏에게서 법을 얻어 귀국 후 남종선을 전했다.
이후 많은 신라승려가 당에 가서 선법을 배워 신라에 전했는데, 주로 남종선이 발달하여 지금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나. 원효 연구와 회통불교
(1) 원효의 생애과 사상
◇ 원효의 생애
한국불교 사상 가장 걸출한 스님 중의 한 분으로 꼽히는 원효대사는 서기617년 신라 진평왕 39년에 지금의 경북시 자인면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 속성은 설(薛)이요, 속명은 서당(誓幢)/ 잉피공(仍皮公)의 손자 /담내내말(談渿乃末)의 아들로 압량군(장산) 남불지촌의 북쪽 율곡 사라수 아래서 태어났다. 원효를 놓고 어머니는 몇 일후 죽고, 아버지도 원효가 3살 때 낭비성 전투에서 죽고 조부에 의해 길러졌다. 원효는 청소년기에 문무를 겸한 화랑도로써 많은 전투에 참여했고, 황금서당이란 화랑의 우두머리 직책을 맡았다. 원효의 출생과 성장과정이 부처님과 많이 닮은 점이 있었고, 결국 원효도 부처님처럼 출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흥륜사에서 법장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영취산 반고사의 낭지(朗智)에게 <법화경>공부를 하였다. 그 후 낭지법사의 명으로 의상과 함께 고구려에서 백제에 와 있던 보덕화상을 찾아가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웠다.
34세 되던 650년 경전 공부를 위해 당나라로 갔으나 요동(遼東)에서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붙잡혀 실패했다. 그 후 661년 의상과 함께 2차 유학을 시도 했으나, 무덤 속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후 깨달음을 얻어 서라벌로 되돌아 왔다. 이때부터 원효스님은 저술에 매진하여 <열반경소><법화경종요><능가경종요><유마경소>등 무려 240여 권의 책을 남겼다.
태종무열왕의 공주인 요석(瑤石)이 스님을 흠모한 끝에 훗날 신라 十賢의
한 사람인 설총(薛聰)을 두었다. 이후 스님은 속복차림으로 스스로 복성(卜姓)거사라 일컫고 무애의 보살행으로 대중교화에 앞장섰으며, <금강삼매경론소>를 짓는 등 저술에 몰두하였다.
- 686년 (70세) 음력 3월 30일 穴寺에서 입적하였다.
- 서울 효창 공원에 원효동상이 건립되었고, 원효대교가 세워졌으며, 국제 원효학회가 발족되는 등 스님의 뛰어나 업적을 기리고 사상을 연구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주17) <고승열전 원효대사 /윤 청광 지음/우리출판사 서문 참조>
◇ 원효의 사상
원효의 사상은 한마디로 一心이다. 또한 和會며 無碍이다. 원효는 다양한 주장인 異爭을 和諍하고 會通하여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歸一心願) 중생들을 풍요롭고 이익 되게 하였다.(饒益요익衆生)
한마음의 근원[一心之源]과 불심의 바다[三空之海]를 통해 깨끗함[眞]과 더러움[俗]이 둘이라는 분별이 없으면서도 어느 한편만을 고집하지 않았다.[無二異不守一] 또한 그는 대중들의 행복을 위해 無碍 행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었다.
(2) 원효의 會通佛敎
원효는 하나의 주의주장에 집착하지 않았다. 원효는 一心이라는 바다와 같은 넉넉한 마음, 우리 모두가 한 뿌리라는 대자 대비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았다.
그리하여 불교의 각 종파나 다양한 주의 주장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항상 긍정하지도 항상 부정하지도 않았다. 부정과 긍정의 다양한 주장[異諍]을 동의하지도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으면서 받아들이는[和會] 법이 和諍法이다.
원효는 一心이야 말로 갈라진 모든 물결들의 始原地 이며, 依支處 임을 강조했다. 삼국이 국토팽창정책에 의거해 주장하는 다양한 정략들조차도 결국 “三韓一統”이라는 기치아래 묶었고, 진제의 입장도 속제의 입장으로 환원하였고, 眞如문을 生滅문에 포함시켰다. 또한 인민의 삶이나 귀족의 삶을 衆生心으로 묶어 세웠다.
결국 중생심이 곧 一心이며, 이 一心이 大乘의 마음이라고 주장하였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소에서 “ 여래가 설한 바 일체의 교법은 일각(一覺)의 맛에 들지 않음이 없다. 일체 중생이 본래 일각이었지만 다만 무명으로 말미암아 꿈따라 유전하다가 모두 여래의 일미(일미)의 말씀에 따라 일심의 원천으로 마침내 돌아오지 않는 자가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18) < 원효탐색 /고 영섭 지음/연기사 67P 참조>
불교의 목적은 뭇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하는 것이고, 그 깨달음이 “ 한결같은 맛(一味)이며 길이다. 갈라진 온갖 지류도 끝내는 바다에 이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원효는 모든 불교 종파 대립은 중생의 마음으로 어느 일면 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그 근원을 찾아 일심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다 통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會通佛敎이다.
(3) 원효의 회통불교 사상과 太古普愚의 圓融思想
원효의 회통불교사상은 태고종의 종조이신 고려조 太古普愚의 원융사상에 이어졌다. 태고보우는 敎와 禪을 일치시켰고, 淨土와 禪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이 원융사상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며 우리 태고종의 종풍이기도하다.
보우는 비록 출가하였으나 부모님께 효도하였고, 속세에서 나라를 위해 國師로써 중책을 맡았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이는 보우가 출세간인 佛僧이면서도 세간을 버리지 않았고 또 세간에 출입하면서도 출세간에 철저했던 것이니 이는 원효의 無碍사상과 그 맥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주19) <보살승단의 정체성과 실천이념/ 하 춘생 지음/ 엔타임/ 137~138P참조>
태고보우의 원융사상은 元曉의 和諍思想을 계승한 것으로 敎와 禪, 生死와 涅槃, 世間과 出世間 등의 모든 현상적 대립을 극복한 通佛敎적인 사상이다.
(주20) <태고보우국사의 종지와 종풍 그 수행법/태고사상5집/사단법인대륜불교/312P>
3. 본론2 (원효의 가르침과 대승보살의 길)
한국불교를 會通佛敎라 하는데, 결론적 불교라고도 표현한다. 중국불교를 종파불교 분파불교라고 하는데 비해, 한국불교는 여러 불교사상을 통합한 회통불교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효의 통불교사상 또는 화쟁사상을 가르키는 것이다.
(주21) <태고보우국사의 종지와 종풍 그 수행법/태고사상5집/사단법인대륜불교/312P>
원효의 화쟁이론은 주로 불교사상에 있어서 주로 대립되는 관점을 융합하는데 역점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원효는 스스로 어느 한 종파나 사상에 국집하지 않고 화엄, 법화, 열반, 정토, 여래장 등의 다양한 경전을 연구했으며 그 모든 가르침을 통합하는 차원에서 이해했다.
이와 같이 대립되는 모든 것을 해결하는 융화의 원리는 一心이다. 다른 표현으로 一味, 一佛, 一乘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체 만유가 우주근원의 한 뿌리로 나왔으므로, 크게 보면 하나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자 대비한 마음이 나온다. 여러 갈래로 시작된 강물이 결국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된다.
自利利他는 대승불교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보살의 행원이자 기본실천 덕목이다. 自利는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수행을 통해 쌓은 복덕과 지혜 등의 이익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利他는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닦는 공덕을 말한다. 自利는 上求菩提요, 利他는 下和衆生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대승보살은 상구보리를 하는 것은 결국 하화중생을 위한 것이다.
원효는 어느 종파나 사상에 한정하지 않고 화엄, 법화, 영반, 정토, 여래장 등 다양한 경전을 연구하고 통달하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경의 통달도 삼국통일 전쟁시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고 끝내 죽어가야만 하는 백성들의 원성과 원한을 달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다. 그래서 묵향 가득한 분황사를 박차고 나와 민중 속으로 뛰어 들었다. 無碍박응 두드리고, 백성들과 함께 나무아미타불을 노래하며 대자 대비한 부처님의 법을 전하였다.
“중생이 앓으니 보살이 앓는다.”라는 유마거사의 명제가 “중생의 병이 다 나을 때 비로소 보살의 병도 다 낫는다.“는 화두가 원효聖師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대비심에서 비롯한 유마보살의 인간이해는 바로 원효보살의 인간이해이기도 하였다. 원효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큰마음, 넉넉한 마음, 모든 것의 근거인 일심(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고, 이를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원효의 심정을 잘 그리고 있는 시 한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은 원효의 삶과 사상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詩人 고영섭씨의 詩이다.
(주22) < 원효탐색 /고 영섭 지음/연기사 3~4P 참조>
◇ 시정에서 부르는 원효의 노래
고 영 섭
햇살 드높은 서라벌의 하늘 크게 저으리
무애박이 깨지도록, 어깨죽지 빠지도록
서울 네거리를 춤추며 노래하리
해진 삼태기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들을 담아 넣고
춤사위 한자락 크게 두르며
시정 속으로 들어가리
들풀들이 아프면 나도 아프리
모든 것에 걸림 없는 한 사람이
한 길로 삶 죽음을 벗어났느니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준다면
하늘 떠받친 기둥을 끊으리
그날 요석다리 아래에 떨어져
개천 시궁창 안의 진한 악취와
양편 둑 위에 질펀히 자라나는
풋풋한 들꽃들의 땀냄새를 맡았네.
짙은 향내음과 촛농에 코막혔던 지난날
두르리는 목탁소리에 귀먹었던 날
서걱이는 들풀들의 가는 목들미를
매운 바람이 움켜쥐고 쓰러뜨릴 때도 나는
들꽃 피어난 서라벌 들판에
질긴 잔뿌리 되어 내리지 못하고
먹내음 그득한 서실 안에서
말씀만을 풀이하고 앉아 있었네.
마땅히 어디서 누구를 건져야 하리
천민촌 북천을 뛰쳐나가는 내게
뒷통수를 찌르듯 던진 한 마디 대안스님 말씀과
저자거리의 불목한이로 남아
난지도 쓰레기장에 모여드는
잠 못 드는 영혼들을 데워준 나를
잘 가게 하며 알아보신
뒷방 늙은이 우리 방울스님 말씀을
저자 속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네.
모두 다 버려야만 보이는 들풀들을
두 눈으로 꿰뚫어 보면서
부질없이 질러버린
종요[宗要]와 논소[論疏]의 문빗장을 열어 젖히고
두드리는 박소리와 휘젓는 춤사위로
뭇 삶들의 바다 속에서
자맥질하기로 했네.
4. 맺는말
가. 우리나라 불교는 會通佛敎와 圓融佛敎이다.
◇ 중국은 불교가 전래된 후 특히 당대에 종파불교가 크게 발달하였다. 천태종, 구사종, 화엄종, 법상종, 정토종, 율종, 밀종, 선종으로 세분되고 분파되었다.
(주23) <중국불교 상권 / K.S 케네쓰 첸 저/ 민족사/ P327~종파불교 참조>
우리나라 불교는 주로 중국을 통하여 삼국시대에 전래되었다. 삼국은 각각 불교를 정치의 구심점으로 삼고, 호국불교로서 보호하고 발전시켰다.
이에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어 중국으로부터 분파된 불교를 각각 시대별로 수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삼국도 처음에는 중국처럼 수많은 종파의 불교가 유입되어 주의 주장이 百家에 이르게 되었다.
◇ 이러한 백가의 주의주장을 하나로 통일하는 원리(和諍과 一心)를 제창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한 인물의 원효이다. 원효의 通佛敎사상은 후일 禪과 敎를 일치시킨 고려 태고보우국사의 원융사상으로 이어졌다.
원효는 오천년 한국 역사상 가장 빼어난 사상가이다. 그의 학문적 화두는 다양한 주장을 회통하고 화해시키는 和諍會通법을 주창하여 모두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했던 것이다.
이념적으로 대립된 수많은 주의 주장을 일심이라는 크고 넉넉한 마음으로 다 포용하고 회통하여 대립과 갈등을 해소시켰다. 그리고 이 땅에 민족불교인 회통불교의 기틀을 세우고 돌아간 거룩한 보살이었다.
나. 극심한 이기주의로 병들어가는 나라 구하는 길
◇ 오늘날 이 땅에는 삼국시대보다 더 분열되고 대립된 수많은 이념과 사상이 있어 우리 모두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남북대립, 동서지역대립, 빈부대립, 종교대립, 정치대립은 물론 지역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개인이기주의가 극에 달하고 있다. 현재는 그 도를 넘어서 병이
들었다.
이 병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은 원효聖師의 “和諍會通” 밖에 없다.
즉 우리민족과 인류는 결국 한 뿌리에서 시작되었다는 큰 마음과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다양한 주의와 주장을 받아들이되, 결코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틀로 판단하여, 무조건 인정하거나 무조건 비판하지 말아야한다.
항상 보편적인 진리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대립하지 말고
대승적 차원에서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수용하되, 부분과 전체도 결국 한 마음에서 나왔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한마음에서는 부분과 전체가 하나이므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 한 것이다.
이와 같이 一心의 관점에서 전체는 부분을 생각하고, 부분은 전체를 생각하고 위할 줄 알아야한다. 또한 각 부분들도 서로 쟁투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화해하고 서로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한다.
◇ 오늘날 우리나라는 위와 같이 수많은 분열과 대립을 “和諍會通” 할 새로운 원효를 찾고 있다.
그래서 우리 태고종도는 이 시대의 원효 보살로 다시 태어나야한다. 그 보살들은 온갖 극심한 분열로 병들어가는 이 나라를 구해내야 할 사명이 있다.
그 구체적 방법론이 “上求菩提 下和衆生”하는 대승보살의 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종도들은 이 원효보살의 길을 반드시 실천하여 이 땅을 복된 불국토인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 佛國土는 모두가 오손도손 행복하게 잘사는 세상인 것이다.
5. 참고 문헌 색인
가. 주 참고 문헌
(1) 한국불교사 강의 노우트 (하춘생 교수님 2007년 1학기 불교학과 강의내용)
(2) 주 참고 도서 <한국불교사/김영태 지음/경서원>
나. 보조 참고 문헌
(1) 원효탐색/ 고영철 지음/ 연기사
(2) 보살승단의 정체성과 실천이념/ 하 춘생 지음/ 엔타임
(3) 태고보우국사의 종지와 종풍 그 수행법/태고사상5집/사단법인대륜불교
(4) 고승열전 의상대사 /윤 청광 지음/우리출판사
(5) 불교사전/운허 용하지음/ 동국역경원
(6) 중국불교 상권 / K.S 케네쓰 첸 저/ 민족사
(주1) <불교사전/운허 용하지음/ 동국역경원 P888 상단 참조>
(주2)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8 상단 참조>
(주3)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8 중단 참조>
(주4) <한국불교사/김영태 지음/경서원 P100 중단 참조>
(주5)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24~29 참조>
(주6) <한국불교사/김영태 지음/경서원 P70 중단 참조>
(주7) <한국불교사/김영태 지음/경서원 P36 상단 참조>
(주8) <한국불교사/김영태 지음/경서원 P60 상단 참조>
(주9)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41 상단 참조>
(주10)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47 하단 참조>
(주11) <불교사전/ 운허용하 지음/ 동국역경원 / P941참조>
(주12)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48 하단 참조>
(주13) 고승열전 원효대사/윤청광 지음/우리출판사/P23하단
(주14) <원효탐색/고영철 지음/연기사 P50 하단 참조>
(주15) < 원효탐색 /고 영섭 지음/연기사 7~8P 참조>
(주16) <고승열전 의상대사 /윤 청광 지음/우리출판사 서문 참조>
(주17) <고승열전 원효대사 /윤 청광 지음/우리출판사 서문 참조>
(주18) < 원효탐색 /고 영섭 지음/연기사 67P 참조>
(주19) <보살승단의 정체성과 실천이념/ 하 춘생 지음/ 엔타임/ 137~138P참조>
(주20) <태고보우국사의 종지와 종풍 그 수행법/태고사상5집/사단법인대륜불교/312P>
(주21) <태고보우국사의 종지와 종풍 그 수행법/태고사상5집/사단법인대륜불교/312P>
(주22) < 원효탐색 /고 영섭 지음/연기사 3~4P 참조>
(주23) <중국불교 상권 / K.S 케네쓰 첸 저/ 민족사/ P327~종파불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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