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부처님 자리에 앉은 선방수좌이야기
    행복의 문 - 법문, 좋은글/♣--남광 엣세이 2006. 10. 16. 14:17

      [부처님 자리에 앉은 선방수좌이야기]

     

       옛날 어느 암자에 노스님이 법당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예불하고, 또 아미타불 정진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평생 참선을 하였던 선객(선방 수좌)한 사람이 찾아와 법당 안에 있던 불상을 치우고  그 자리에

    그가 앉았다. 그리고는 “ 노스님은 평생 마음속 부처는 보지 못하고 왜 바깥의 형상에만 집착하시오.”

    하였다.  그러자 노스님은 껄껄 웃으며, “그대는 마음속 부처는 알아도 마음 밖 부처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네”하셨다. 그 수좌가 그 까닭을 묻자 ~

      “본래 마음은 안 밖이 없거늘 그대는 한 경계에만 집착하고 있소.”


      “ 관무량수경에 이런 말이 있소. 야마천으로부터 색구경천까지의 모든 천상(사바세계도 포함)들은 각기

    지은바 업력의 불가사의한 과보에 의하여 자기에 합당한 세계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고. 모든 부처님의

    세계도 또한 불가사의 하여 그 불국토에 사는 모든 중생들은 이미 지은바 공덕과 선업에 의하여 나타난

     땅에 머물 뿐이 라고 하였소.”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보는 세계는 중생의 불가사의한 업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극락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원력과 업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니 둘 다 사실상 존재하는 말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객관적 대상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보는 경계에 불과하다. 그것을 우리는 현실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영원하다고 보는 것이 상견常見이다. 이러한 주장을 事에 입각한 주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대로 한마음 돌이켜 깨치면, 부처요. 양변을 여의면 부처요, 자기를 버리면 부처요, 본래 내 마음은

     청정하니 내가 바로 부처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은 이치를 설명한 말이다.  즉 이것은 理에 입각한 말로

     일종의 단견이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아직 깨우치지 못한 중생심에 있다는 사실(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자기가 다 깨달은 부처의 마음이라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치를 알음알이로 아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선객들이 지금도 정토신앙이란 무식한 아녀자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오직 理에만

     매달리고 있다.  이것은 理와 事가 본래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한 말이다.


       기신론에 의하기를 금광석에 있는 금은 금이로되 불순물이 섞인 금으로 100%로 순금은 아니다. 제련을

     하여 불순물을 제거 해야만 순금이 된다.

        이와 같이 중생심은 본래 부처의 마음이기는 하나 번뇌가 섞인 마음으로 마치 제련되지 않은 금광석과

     같다.  따라서 삼독에 물든 번뇌를 씻어야 청정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불자들이  “내 마음이 부처요. 극락인데. 따로 극락을 왜 찾는가하고 망언을 서슴치

     않고 있다." 이는 마치 자신이 제련되지 않은 금인 줄 모르고  스스로가 순금인줄 착각을 하는 것과 똑 같다.


      깨달음의 경지인 覺에는 시각始覺, 본각本覺, 구경각究竟覺이란 말이 있다.

    시각이란 중생심과 佛心이 함께 있던 것을 마치 불순물이 썩인 금광석을 제련하여 순금으로 만든 것과

    같다.  본각이란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던 근본 불성으로 본래 금을 이야기한다. 구경각이란 중생이 수행을

    하여 얻은 시각이나 본래중생이 갖추고 있던 본각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뜻한다.

      

       그래서 理는 본각을 나타내고, 事는 시각을 나타내는 데, 理는 事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금광석을 제련해야 만 순금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理를 결코

    얻을 수 없다.


       理를 정말 잘 아는 사람은 事를 실천한다. 담장이 무너질 줄 아는 사람은 곧 바로 담장을 고치는 것이다.

    즉 理와 事를 동시에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事를 무시하고 처음부터 理에만 치중하는 것은 마치 허공 中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이상주의

    일 뿐이다. 그래서 잘못하면 위에서 예를 든 부처님 자리에 앉는 선방 수좌와 같이 될 수 있다.


      특히 대학에서 이치만 논하고 실천 수행을 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된다. 이점을 배우는 학생이나 불자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