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랩] 진묵스님 발자취를 찾아서-전주 근교 일출암, 정수사행복의 문 - 법문, 좋은글/○--고승열전 2009. 5. 27. 20:18
진묵스님 발자취를 찾아 전주 근교의 두 절을 찾았다. 일출암(日出庵)은 외막골이라고 부르는 동리를 지나 작은 산 중턱에 있었다. 그러나 도로 어느 곳에도 이정표가 없어서 애써 찾았다. 진묵스님이 일출암에 계실 때에 외막골에 어머님을 모셔와 살게 하였다는 동리이다. 정수사(淨水寺)는 완주군 상관면에 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 진성여왕 2년(서기889)에 도선국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그 뒤 고려시대에 중건하였으며, 낡아 조선시대에 와서 선조때 진묵대사가 또다시 증축하였다. 이 곳 정수사는 사철 맑은물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전주시의 중요한 상수원인 수원지가 있으며, 이곳은 완주군의 중요한 약수터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다른 여느 기록에는 진묵스님의 발자취가 이곳 정수사에도 다녀 가셨다는 기록이 없어서 확실치는 않다. 다만 완구군청 홈페이지에 정수사에 대한 설명이 있을 따름이다. 정수사를 찾아 갔으나, 스님이 마침 출타 중이어서 확인해 보지 못했다.
일출암은 도로 어디에도 이정표가 없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산 비탈을 혹시나 하고 올라 가다가 이 비석을 발견하여 기뻤다.
일출암 입구.
일출암 입구의 여러 간판.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양이다.
특이한 까만 불상들. 바닥에 내려 앉았다.
입구에 마한문화연구소라고 붙어 있더니, 여러 골동품들이 보인다.
흙으로 빚은 나한상.
법당 안 좁은 복도에 진열된 나한상과 공동품.
일출암 전경.
진묵스님이 계셨던 곳이어서인지 해우소 조차 그냥 지나치기 아쉬웠다.
일출암에서 바라본 동쪽 능선. 정동 방향에 자리 잡았다.
진묵스님 어머님이 살으셨다는 외막촌 전경.
일출암 아래 돌로 쌓은 탑이 두어 기 있었다.
외막골 전경.
진묵스님의 어머니 조의씨 진영. 성모암 뒤 진묵조사전에 있는 진영이다.
진묵스님의 누이 동생 진영.
정수사.
정수사 부도전.
진묵스님이 일출암에 계실 때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日出庵의 도반들, 그리고 樂水川 사미
석양 무렵에 당도한 곳은 용진면의 일출암(日出庵)이었다. 봉서사와 비교적 가까운 곳인데, 그곳에는 마침 월명암 도반 진여와 혜성 두 스님이 있었다. 시냇가에서 헤어진 지 3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진묵은 이처럼 큰 사찰에는 들르지 않고 작고 가난하여 낡은 기왓장 사이로 물이 새거나 대들보가 내려앉을 만큼 궁색한 절이나 암자만 찾아다니면서 그 절의 중창에 힘을 보태고 다녔다. 그가 머물렀던 사암의 기록에는 거의 ‘...중창주 진묵당...’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그러면서도 평생 주지 직은 한 번도 맡아 하지 않았다. 명리를 떠난 물외(物外)도인으로 평생을 지낸 것이다.
일출암에 주석한 어느 날 진묵은 어머님과 누이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두 도반에게 말했다. 두 도반은 출가한 물외도인의 효심을 생각하며 차라리 어머님을 이 절에서 모시고 셋이서 아들노릇을 하자고 했지만, 진묵은 절에 속가 사람을 들여 사는 것은 세인의 입방가가 될 것이라며 마다했다.
진묵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사십이 넘은 나이에 진묵이 출가하여 어언 삼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회갑이 다 되어가는 어머니는 누이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었다.
진묵은 어머니가 계신 김제를 향해 가다가 두 도반과 헤어졌던 낙수천에 이르렀다. 비가 많은 계절이라 물이 불어나서 제법 큰물이 소리 내어 흐르고 있었다. 낙수천을 건널 궁리를 하면서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난데없이 앞에 자기 상좌만한 사미승 한 사람이 앞서 가고 있었다. 진묵은 걸음을 재촉하여 사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사미와 이야기를 하면서 낙수천에 당도하였는데, 예상대로 물이 많이 불어나 있었다. 사미가 먼저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가서 성큼 성큼 걷는데 겨우 무릎 밑에까지 물에 잠기는 것이었다. 개울을 중간쯤 건너던 사미가 진묵을 돌아보며 말했다.
“스님! 얼마 깊지 않은데요. 어서 건너오시지요.”
진묵은 열 대 여섯 살 정도 된 사미가 쉽게 건너는 것을 보고 마음을 턱 놓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갈수록 물이 점점 더 깊어져 가슴까지 닿았다. 다급해진 진묵이 사미에게 소리쳤다.
“어어? 애야 어서 날 좀 구해다오!”
사미는 이미 건너 언덕에 올라가 있었다. 사미는 문득 놀란 것처럼 하면서 여전히 무릎을 적실 정도의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진묵을 덥석 업고 건너편 언덕으로 갔다.
“고맙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큰 일 날 뻔 했구나.”
“아닙니다. 다만 지난날의 묵은 빚을 갚았을 뿐이옵니다.”
사미는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총총히 떠나더니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진묵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달달 볶아대던 그 나한이 장난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묵은 사미가 사라진 곳을 엄숙한 표정으로 응시하다가 크게 꾸짖었다.
“얘, 소승종자야! 네가 비록 신통을 부려 나를 희롱하였다마는, 그 신통이란 것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하여라. 신통은 내가 너에게 못 미친다손 치더라도 너희가 여래지를 들기 위해 대도를 닦을 적에는 응당 내게 물을지니라. 내 그대들을 위해 한 게를 줄 것이니, 자세히 들으라.
奇汝靈山十六愚 樂村齋飯幾時休
神通妙用雖難及 大道應聞老比丘
영산의 십육 어리석은 나한 너에게 부치노니,
촌 잿밥 즐기는 것을 언제나 쉬려느냐?
신통묘용은 비록 너에게 못 미치지만,
대도는 응당 이 노 비구에게 들을 지니라.”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는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진묵이 일출암으로 돌아갔을 때 두 도반에게 그 일을 말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진묵은 두 도반의 호의로 일출암 아래 왜막촌으로 어머니를 모셔 왔다. 아무래도 가까이에서 보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왜막촌은 지금 전주 아중저수지 옆의 왜막 저수지 윗동네라고 한다. 한번은 진묵이 어머니를 만나보러 내려 와 보니, 여름에 모기 등 물것이 많아서 어머니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심하게 상해 있었다. 진묵은 이에 그곳 산신을 불러 호통을 쳤다.
“그대는 부모님도 없는가? 어찌하여 우리 어머님을 저 지경이 되도록 까지 놓아두었는가? 당장 모기들을 없애지 못할까?”
그 후로 이 왜막촌에는 모기나 깔다구 등이 없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알아보지 못했다.
출처 : 미륵산 心地院글쓴이 : 들풀 원글보기메모 :'행복의 문 - 법문, 좋은글 > ○--고승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진묵스님 발자취를 찾아서-완주 청량산 원등사 (0) 2009.05.27 [스크랩] 진묵스님과 강증산의 발자취를 찾아서-모악산 금산사. (0) 2009.05.27 [스크랩] 사모곡/진묵스님 (0) 2009.05.27 불교중흥의 꽃을 피운 탄허 (0) 2007.12.26 태고보우의 원융불교 (0) 2007.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