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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님의 생애
    불교 공부/불교입문 2008. 2. 18. 09:15
     

      2장. 부처님의 생애

       1. 부처님의 탄생 (태자의 탄생)

     

      부처님은 기원전 624년 히말라야 남쪽 산기슭 갠지스강의 한 지류에 샤카족의 카필라국(도시국가)에서 태자로 태어났습니다. 카필라국은 당시 아리안족의 강대국인 코살라국의 한 지방 부족 국으로 자치권만 인정된 비 아리안 족이었으며, 그 나라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업국이었습니다.

      이미 40세가 넘은 아버지 정반왕(숫도다나)과 어머니인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나 온 나라의 경사였으며, 태자의 이름은 싯다르타(일체가 다 이루어지리라는 뜻)라고 지어졌습니다.  마야부인은 태자를 낳은 지 이레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농업을 중시하는 나라였으므로, 벼를 재배할 때 벼 모종을 심고, 기나긴 여름을 지나 가을에 수확하듯이 일련의 긴 과정을 필요로 하는데,  물론 태자도 자라면서 이러한 단계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수행을 통해 자신의 청정함을 단계단계 이루어가는 불교가 지닌 고유한 성격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점이 유목민으로부터 발생한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성격을 달리하게 된 요인이 됩니다. 즉 유목민의 종교는 쉽게 결과(영생, 행복)를 성취하려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타 선인이 태자의 얼굴을 보니 장차 자라서 전륜성왕이 되거나 진리를 증득하는 부처님이 되리라 예언했습니다.


     2. 태자의 번민  


      태자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랐으며, 자라면서 바라문의 가르침이나 무술, 학문 등을 골고루 배웠습니다. 그러나 태자는 이모인 마하자파티에 의해 길러졌으므로 항상 마음속에 어머니 생각이나 골똘히 사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부왕은 여름 궁전,겨울 궁전, 봄 가을 궁전 즉 삼시전을 지어서 놀게 하였지만,  그 모든 것이 태자에게는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농경제에 참석하여 농부가 밭가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쟁기 끝에 한 마리 벌레가 꿈틀거리는 듯 하였는데 새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날아들어 쪼아 물고 올라갔습니다. 곧이어 또 다른 새가 그 벌레를 문 그 새를 차고 오르는 모습을 보고, 태자는 약육강식의 처참한 현장을 뼈저리게 느끼고 환궁도 잊은 채 삶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태자는 모든 일을 예사로 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동문 밖에 나갔다가 백발이 성성한 허리 굽은 노인을 보고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는 사실을 실감하였고, 남쪽 성문밖에 나갔다가 고통에 신음하는 병자를 보고 병에 시달리는 인생의 괴로움을 실감하였고, 서문 밖에 나갔다가 장사 지내러 가는 상여의 행렬을 보고는 세상에 태어난 자는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북쪽 성문밖에 나갔다가 평온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한 출가 수행자를 보고 “생노병사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왕이 태자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을 염려하여 서둘러 결혼을 시켰고, 부인은 야소다라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 라훌라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3. 출가

      라훌라라는 아들이 탄생하자 태자는 출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중아함경 권56에는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출가하는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지저분함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 즉 열반을 얻기 위해서이다.”


      4. 구도행각


      구도자가 된 싯다르타를 사문(沙門) 고타마라 부릅니다.

    (1) 싯다르타가 처음 찾아간 수행자는 “바가바”라는 고행주의자였으며, 고행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었는데, 바가바는 생천(生天) 즉 하늘에 나기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하늘에 태어나려면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 또 설령 하늘에 태어난다 해도 수명이 다하면 죽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2) 그 후 당시 유명한 수도자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가 라마풋다”를 스승으로 수행을 하였으나 이들은 의식집중에 의한 정신적 작용이 전면 정지된 고요의 경지에 이름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해탈이라 하였으나, 사문 고타마는 이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의식집중상태가 끝나자 곧 전의 상태로 돌아와 고통 없는 절대 해탈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떠나 홀로 수행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사문 고타마는 가야 네란자강 근처의 고행림을 찾았으며, 이곳에서 그는 목숨을 건 맹렬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의 혹독한 고행을 하였는데, 당시 이 고행 수행은 육체에 극심한 고통을 가해 열을 발생시켜 해탈에 이르고자 하였던 전통적 수행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배를 타고 가는 스승과 제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첫 번째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즉 “악기는 줄을 너무 세게 당겨도 안 되고, 또 너무 느슨하게 당겨도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중도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즉 “정신이 육체에 갇혀 있다.”라는 잘못된 생각이 고행을 강요한 것 이었습니다.  발상자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네란자강에 들어가 몸을 씻고, 수자타라는 한 처녀에게서 우유죽 공양을 받았으며, 곧 이 고행주의를 버렸습니다.


     5, 중도의 이치를 깨달은 후의 수행   

     

      사문 고타마는 중도의 이치를 깨달은 후 고행주의를 과감히 버리고, 그늘이 좋은 보리수  나무로 자리를 옮겨 그 곳에서 정좌하고 명상에 들었습니다.

    “도를 이루지 못하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이렇게 결심하고, 선정에 드신지 칠일 째 되던 날 아침 샛별을 보고서~ “최고의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얻었습니다.  


      사문 고타마는 배회의 미로에서 벗어나 마침내 영원히 생노병사를 여의고 무고안온(無苦安穩)의 열반을 얻었으며, 그는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최상의 행복을  성취하였습니다.

      생노병사의 모든 고통의 원인은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 곧 무명(無明)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연기(緣起)하는 도리를 관찰하였습니다.

      이때의 심정을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일체의 승자이며, 일체의 지자(智者)이다. 일체법에 물들지 않고 일체를 버렸으며, 갈애(渴愛)가 다하였다.”


     6. 가르침의 장도

     

    (1)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부처님은 형언할 수 없는 법열(法悅)에 잠겼으나, 만족감과 기쁨이 자신의 것에 국한되어서는 안 됨을 잘 알았습니다. 보편타당한 진리를 바로 깨달은 이는 그 진리와 하나 되기 때문에 그 진리를 몸으로 삼는 대우주에 자기의 에너지를  돌려놓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시고, 중생 없는 부처님은 그 이름이 있을 수 없고 중생 없는 부처는 그 존재가치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깨달은 진리의 내용이 너무도 난해해서 일반 중생들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세상 사람들은 쾌락이나 신에 빠져 있기 때문에 연기의 도리나 열반의 경지를 깨달을 수 없다.  법을 설해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랴!”라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일은 곧 자비행(慈悲行)이다.” 이렇게 외치며 가르침의 장도에 올랐습니다.


      부처님은 영원한 자유와 영원한 행복,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도달한 그 경지가 너무나 심오하므로, 일반 범부 중생에게 한꺼번에 다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반 범부중생들이 수준과 성향이 각자이므로 그에 맞는 설법을 했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깨달은 내용을 자세하게 설법하였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결국 아집과 이기심에 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고,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無明)에 있음을 항상 중생의 입장에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생이 어떻게 하면 그 고의 원인을 철저히 깨닫고 그것을 벗어나게 할 것인가?”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 주요한 내용이 사성제(四聖諦)와 십이연기(十二緣起) 그리고 팔정도(八正道) 등으로 이를 차례로 설법하였습니다.   

          

       ● 부처님의 종교적 사상

      부처님은 그 당시 브라만교 내지 많은 사상가들의 사상을 꿰뚫어 보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렸습니다.  즉 무조건적 배타주의가 아닌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며, 관용적 비판주의를 취하였으며. 이점도 중도사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최초의 전법 (初轉法輪초전법륜)


      최초의 전법은 부처님이 처음 출가하여 고행을 할 때 부왕이 보낸 5명의 시종이었습니다.

        그들은 옛날 사문 고타마가 고행주의를 버리자, 그를 비난하고 떠났던 자들이었는데, 부처님의 존안을 보자마자 감복하여 경배하고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교진여등 5비구에게 비로소 감로의 법문을 열었으니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욕락(慾樂)과 고행(苦行)의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취할 것을 가르쳤으며, 그 구체적 내용으로 연기(緣起),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다섯 제자는 곧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어 진리의 세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계셔 즐겁고 부처님 제자가 있어 더욱 튼튼한데 법문이 있어 온 세상을 기쁘게 하니 비로소 만 중생의 귀의처인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부처님, 부처님가르침, 부처님제자)가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3) 전도의 사명을 맡기다

     

       부처님은 첫 5제자를 둔 후, 부호의 외아들로써 인생을 비관하고 번민하던 야사라는 청년을 교화시켜 제자로 두게 되었고, 그의 부모님들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그 후  그 친구 55인이 출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60명의 제자가 생겼을 때 부처님은 그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맡기었습니다.


     “수행자들아, 전법하러 떠나가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신(神)들과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둘이서 한 길로 가지 말라.”

               전도선언(SN1. 105 MV 1.11.1 "잡아함”, 39. 16)


      그 후 부처님은 당시 인도 문화의 중심지인 마갈타국의 왕사성으로 갔습니다. 가는 길목에서 30명의 청년들을 교화하고, 바라문 가섭3형제를 교화하여 제자로 받아 들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제자 1,000명도 제자로 부처님께 귀의 했습니다.     더구나, 마갈타국 국왕인  빔비사라도 부처님제자가 되었고, 빔비사라 왕에 의해 왕사성에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세워졌습니다. 이로써 불교의 교세가 빠른 속도로 커져갔습니다.


     (4) 평생을 전법하다.

      

       부처님은 고향 카필라성을 방문하여 부왕 정반왕을 비롯하여 많은 친척과 그 곳 사람들을 교화하고, 사촌 아난과 아들 라훌라 등 친척들을 출가시켰습니다.      그리고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에 사는 큰 부호 수달다가 대중들의 법공양을 위해 사위성에 기원정사를 지으니 불법(佛法)은 이 두 사원을 중심으로 크게 번성해 갔습니다.


       부처님의 교화 중심은 왕사성과 사위성 이었으며 당시 불교는 열정적인 제자들의 포교의 힘으로 동쪽으로는 갠지스강 하류까지 전해졌고, 서쪽으로는 아라비아해 연안까지 전해졌습니다.


      부처님은 승.속을 드나들며 교화하였다. 누구도 차별 짓지 않고 법을 전하였습니다. 남녀의 차별도, 나이의 차별도 출신의 차별도 짓지 않았습니다.

     이는 절대평등의 진리를 펴 보인 것이요, 중생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자비행을 몸소 실천해 보인 것입니다.


     7. 위대한 낙조(落照)


      바이살리 근교 대림중각강당(大林重閣講堂)에서 설법 끝에 부처님은 석달 후 입멸하리라 예언하였습니다. 그 후 쿠시나가라를 향해 길을 가시던 중에 대장장이 춘다의 버섯 공양을 받으셨고, 부처님은 공양을 차별 없이 말없이 드셨는데, 결국 그 원인으로 심한 복통을 일으켰으며,  열반에 드시게 되었으나. 춘다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은 “춘다의 공양은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의 공덕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쿠시나가라 사라수 쌍수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목숨이 경각에 있는 상황에서도 마지막 출가 제자 수바드라에게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셨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적 삶인가?


     부처님은 이렇게 위대한 낙조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만 중생의 가슴에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감동을 느끼게 하였으며,  지구상의 그 어떠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 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부처님의 생애와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자비로의 여로이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무한한 가능성을 몸소 실천하였고, 영원한 자유와 영원한 행복을 찾았고, 또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행복을 구현해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 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대열반의 법문을 내어 놓았습니다.


      인류의 희망, 부처님은 이 세상에 와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쿠시나가라에서 2월 보름 세수80에 진리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니 이때가 BC544년이었습니다.

     부처님은 본래가 생멸이 없건만 한번 나심으로 중생에게 환희심을 일으키고 한번 드심으로 중생들에게 분발심을 일으켰습니다.


      열반의 소식을 늦게 듣고 찾아와 울부짖는 제자 가섭에게 부처님은 말없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 보이며,  부처님의 진정한 법신(法身)은 영원함을 만 중생에게 또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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