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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살하는 것도 한 생각 ! 근본불교, 대승불교도 주장도 한 생각의 차이일 뿐 !행복의 문 - 법문, 좋은글/♣--남광 엣세이 2011. 9. 21. 23:01
자살하는 것도 한 생각 !
근본불교, 대승불교도 주장도 한 생각의 차이일 뿐 !
◇ 몇 일 전 오후
어느 여성 불자님으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스님, 저 상담할 일이 있습니다. 불교 방송을 듣고 스님께서 전화상담도
해 주신다기에....스님 전 너무 괴롭습니다. 어찌해야 할지요?”
하면서 그 여성 불자님은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네, 불자님 무슨 일로 그렇게 괴로워하십니까? ”
“스님, 저 남편이 20년 동안이나 저를 말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직 가족을 위해 헌신해 왔는데 한번 도 이런 나를 인정해 주기는커녕 나를 박대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23살 먹는 딸까지 남편 편을 들고 내가 옳지 않다는 생각에 너무 기가 차고 온가족이 이렇게 가족위해 헌신한 나를 오히려 무시하니 정말 분하고 살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나를 발견하고 이렇게 살려놓았습니다.
스님, 이젠 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전 아무런 인생의 희망도 없습니다.”라고 절규 하였습니다.
“불자님, 지구상에 수십억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은 다 다릅니다.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부부는 처음부터 생각이 다릅니다. 또한 자기 배속에 태어난 자식조차도 생각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 마음과 같지 않다고 서운해 하고, 분하게 여기고 심지어 불자님처럼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불자님, 인생에서 철이 든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다른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 다음은 그 사람의 관점에서 허심탄회하게 이해하고 배려하면 타투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상대를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면 세상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해가 되고, 다툼의 마음이 사라져 결국 오손도손 잘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차분하게 설명을 하자 그 보살님은 울음을 멈추고 말없이 스님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불자님, 남편과 따님이 불자님의 마음을 지금 이렇게 아프게 하였다는 것은 인연법으로 볼 때 전생과 이생에 알게 모르게 남편과 딸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먼저 남편에 대해 참회기도를 100일 지심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도 기간 중에 남편에 대한 미운감정이 사라지게 되고 어느 듯 남편이 왜 나를 못마땅하게 하는지 나의 말, 행동, 생각을 차분하게 살펴보게 됩니다.
그러한 지혜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피입니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지혜를 가지는 순간 세상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성심을 다해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음과 같은 문자가 나왔습니다.
“스님, 오늘 오후에 전화로 급하게 상담 드렸던 사람입니다.
막막하고 길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스님 말씀 듣고 제가 하고 있던 기도와 남편에 대한 참회기도를 오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스님 말씀이 저에게는 한 줄기 삶의 빛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법문이겠지요. 감기 걸리셔서 말씀하시기 힘들어 하시면서도 진심으로 상담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앞으로 나쁜 생각안하고 기도정진하고, 불자로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 요즈음 근본불교만이 오리지널 불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다 맞는 이야기가 됩니다.
근본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전해져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경전은 후대에 다 만들어졌으므로 불설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아울러 영원한 불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은 마치 영원한 나를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영원불멸의 신을 주 장하는 기독교의 생각과 같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들의 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지구상의 어떤 문명과 문화도 홀로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도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불교는 인도의 바라문과 수많은 사상의 영향을 받아 태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윤회사상이나 해탈사상 등도 이미 고대 인도에 그 기반이 있었 습니다.
이러한 토대위에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여신 후
연기의 이치와 삼법인의 이치와 중도의 원리로 해탈
열반의 의미를 다시 정립하신 것입니다.
윤회사상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오직 근본불교의 경전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 주장에 앞서
대승불교가 왜 생겨났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80화엄경 정도는 잘 읽어 보셔야 합니다.
화엄의 이치를 터득하셨다면
대승이니 근본이니를 따지지 않게 됩니다.
진리에는 시비가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중생들의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
[대승불교는 왜 생겨났는가?]
초기불교가 발달하면 극단적인 분파주의가 생겨났습니다. 각 계파 간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교단이 분열되고 드디어 서로 반목하고 심지 어 싸우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분파주의가 왜 나왔습니까?
극도의 분파주의 결과 불교가 대중들에게서 멀어졌고, 이에 불교 중흥을 위해 나타난 운동이 바로 대승 불교 운동이요, 대승보살 사상입니다
분파주의는 한마디로 자기가 옳다는 생각입니다.
“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러다. 내가 오리지널이다. 내가 불설에 더 가깝다. 따라서 내 주장만이 옳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짝퉁이다.”라는 생각에 불이 붙어 상대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극도로 분파되었던 시대는 물론 이 시대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직 자기 생각만이 개혁불교라 생각하고 내식대로 개혁해야
만이 살 수 있다.”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타당하 고 좋은 것이 있다고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그들 외 에도 훌륭한 가르침이나 진리가 있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의 가르침입니다.]
연기(緣起)란 무엇인가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지면 연하여 저것도 없어진다.
따라서 모든 것은 연하여 의지하여
존재하므로 고유한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만들어진 어느 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정불변의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無我)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데도
사람들은 영원함을 갈구하고 자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현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사람은 고통에 쌓이게 된다.
무상, 무아, 일체개고 이것이 삼법인이요, 불교 가르침의 원리입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 경전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타당하고 찬성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이 이 현대에 맞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엇보다 대중의 화합을 중시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극단적으로 주장하였던 계율주의 데바닷다를 교단에서 내보냈던 것입니다. 하물며 어떤 계율이 옳니 그르니 하는 극단적 분파주의가 사실은 더 불교의 단합을 저해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초기(소승)불교가 점점 대중으로 부터 멀어진 것이지요.
세상은 무상(無常)합니다. 그래서 역사가 생겨난 것 아닙니까?
초기(소승)불교가 점점 대중으로 부터 멀어진 것이 원인이 되어
대승불교가 태동하게 된 것이지요.
즉 인도의 불교 대중의 지지를 얻어 나온 것이 대승불교 아닙니까?
그러나 이 대승경전의 모태는 바로 근본경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분파되어가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에 힘을 기울인 것이지요.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보는 풍토가 전개 된 것입니다.
이 마음이 다름 아닌 자비(慈悲)라는 마음입니다.
대승보살의 마음 한없는 자비심의 발로인 것입니다.
[자비(慈悲)]
자(慈)는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의 마음을 말합니다.
비(悲)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 주려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너와 내가 서로 의지하여 있고, 일체가 다 연기해 있으므로
너와 내가 평등하고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무아이므로 공(空)인 것이요,
이 공성(空性)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성불(成佛)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자비심은 무아(無我)를 직접 몸소 체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 사상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니까야 경전을 다 읽고, 대승경전을 다 읽는다 해도 또 수많은 나까야를 다 읽는다 해도 자비심의 마음을 일어나지 않으면 헛공부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대승불교가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까지 이어지면서 이지역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얻으면 천년의 세월을 부처님의 자비심을 심어주며 오늘에 이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시대와 그 지역에 맞는 교화법이 나온 것이지요.
그러므로 근본불교가 스리랑카나 남방불교쪽에 자리를 잡아 면면히 부처님의 자비의 말씀을 이어왔다면, 대승불교는 북방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이지역의 민족들에게 부처님의 자비심을 심어온 것아닙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의 가르침입니다.
[달라이라마는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배워가는 길이 "배려와 착함"이 라고 합니다.
따라서 근본불교도 훌륭하고, 대승불교도 훌륭한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나 가치관을 이 삼법인에 비추어 보아 어긋나면
그 견해는 자기중심적인 아전인수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근본불교만이 오리지널 원조 불교이며
대승불교는 짝퉁이다.”라는 자기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다는 것은(집착=法執)
삼법인에 비추어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근본(원시)불교의 지나친 분파작용 때문에 대승불교가 태동되었다.
근본(원시)경전도 훌륭하고, 대승불교도 훌륭합니다.
◇ 대승불교도 근본불교를 바탕으로 성립했습니다.
근본경전 속의 중요내용이 다 녹아 있습니다.
대승경전의 모든 곳에서 삼법인에 어긋나는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다 녹아 있으며
자비와 평등을 가르치는 훌륭한 경전이요
무상과 무아와 일체개고와 사상제 그리고 중도의 가르침이 모두
녹아져 있습니다.
[예1] 여벌유자법상응사(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금강경)
금강경에 뗏목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는 맛지마니까야에 있는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 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MN22/ 전재성 역)에 있는 내용과 매우 유사 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저 언덕에 도달하였을 때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해야 그 사람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뗏목에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님 것임에랴!
금강경에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이 있습니다.
이를 해석하면 “뗏목의 비유로 알아들어서 물을 건넌 뒤에 뗏목을 놓고 가듯이 법에 대한 집착을 벗어야 하리니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 하리요”라는 의미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니까야의 내용과 거의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설]
<무주상보시를 하되 처음에는 상이 있는 보시를 하다가 나중에는 보시하는 일이 박 먹듯이 일상화 되면 내가 보시한다는 상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보시했다는 것에 저절로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무주상 보시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설한 것이며,
무주상보시를 하였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시를 계속 행해야 하지, 무주상 보시만을 강조해서 무주상보시가 되지 않으면 보시의 공덕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보시하고 자랑하는 사람을 막는 행위는 바로 무주상보시란 말 자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법집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 법집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시자체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즉 진리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2]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잡아함경 228. 포말경(泡沫經)에
“~일체 물질 무더기는 사납게 흐르는 물살에서 생긴 물방울처럼 덧없고
실체가 없고, 일체느낌 무더기는 사납게 흐르는 물 위의 물거품처럼 덧없고
실체가 없으며, 일체의 생각무더기는 늦봄과 초여름 한낮의 아지랑이처럼
덧없고 실체가 없고, 일체 지음의 무더기는 속심이 없는 파초무더기처럼
덧없고 실체가 없고 일체식 무더기는 마술쟁이가 부리는 마술처럼 실체가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금강경의 다음구절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과 유사합니다.
즉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도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한다”라고
설명한 것과 유사합니다.
[예3]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 以生其心)
금강경 사구게 중에
‘應無所住 以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생각을 내라”고 되어 있으며
“어떠한 생각도 집착을 하지마라.”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또 이것은 이미 지나간 생각에 매이지 말고, 현재 생각
즉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상응부경(잡아함경), 아란냐경(Aranna Sutta, 숲속의 경)
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 지나간 과거를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열망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기 때문에 얼굴빛은 그렇게 평온하다네.
<상윳따니까야1, 데와따 상윳따, 아란냐경(Aranna Sutta, 숲속의 경)>
이 경전도 바로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금강경의 ‘應無所住 以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란 게송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예4]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경의 사구게 중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가 있습니다.
“만약 색으로 나를 보려하거나, 소리로서 나를 구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사람으로 결코 여래를 볼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도 다음과 같이 초기경전인 니까야에 뜻이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왁깔리라는 비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거나 수행을 하는 것보다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부처님은 이러한 왁깔리를 깨우쳐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이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왁깔리 경(S22:87) §8/ 각묵스님 강의 참조)
그리고는 오온의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을 설하시고 염오, 이욕, 해탈, 해탈지를 설하셨습니다.
또 이 경전과 뜻이 통하는 금강경 제 13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붓다시여,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삼십이상은 곧 삼십이상이 아니고,
이름이 삼십이상일 뿐입니다.”(금강경 제13품)
◇ 이와 같이 초기경전의 주요 내용들이 대승경전에 그 핵심은 다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법인, 12연기, 윤회, 중도의 가르침 등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초기경전은 물론
대승경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원리가 빠진 경이 있다면 그것은 불경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부처님의 사상과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는 대승경전은 그대로 불경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불교학자들의 다수 의견입니다.
◇ 법구경에 이르기를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해,
스스로 그 듯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그렇습니다.
비록 대승불교 경전이 후대에 만들어 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자비사상이 녹아져 있고, 더구나
삼법인, 12연기, 윤회, 중도의 가르침 등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녹아져 있다면
위 법구경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경전(근본경전) 만이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법에 집착하고 법에 빠진 것입니다.
더구나 원조 운운하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 근본불교만이 유일한 불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승불교와 기독교의 교리가
유사하다 고 주장합니다만 그것은 크게 잘 못 생각한 것입니다.
불성이라는 것은 그것을 진리자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진리는 영원하여
변함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 무상(無常)이라고 할 때 유위법으
로 만들어진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때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은 공성(空性)을 뜻하며 그것은 無我요,
평등이요, 중도를 뜻하며 그 내용은 자비(慈悲)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과법칙이 적용 적용됩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창조주로서의 신을 믿지 않습니다.
대승불교에 수 많이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불성을 지니며, 공성이요, 무아요
자비의 화신으로 인과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 닦아 그 지위에 오른 자입니다.
결코 하늘의 계시에 의해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창조된 것이 없습니다.
80화엄경을 다 읽어 보면 화엄경에나오는 신의 개념은 기독교의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지금까지 근본불교 학자들은 그 구분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신의 개념 속에 근본불교는 물론 대승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다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근본불교를 주장하는 분들은 화엄경의 이치를
터득하였다면 결코 불교 원조 운운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불교의 핵심인 무아(無我)나 평등성 중도의 이치를 체득하지 못하고
문맥하나 붙들고 늘어지는 것과 같이 대승불교의 진수를 체득하지 못하고 잘 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일부 근본불교 학자들이 하루 빨리 부처님의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대승불교와 불교전체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 그러나 기독교인이 주장하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는 창조론이며,
인과법칙도 무아도 공성과도 거리가 멉니다. 또 윤회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이 있을 뿐입니다.
◇ 그래서
부처님이 걱정하신 것은 교단의 분열이요, 불협화음인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바닷다에게
“데바닷다여~교단에는 계율과 규칙은 본질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 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화합을 중시한 부처님에 반발하여 원리주자 데바닷다가 교단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제 근본불교만 옳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마치 부처님 당시 원리주의 자 데바닷다와
너무 흡사합니다. 또 기독교인이 그들만이 유일한 신을 주 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대승불교가 더 훌륭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이젠 정신 차리고
근본불교 경전을 많이 공부하셔야 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전법의 지침이 나와 있는 근본 경전을
귀하게 여기고 생활법문에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니라 화합입니다.]
원효스님의 화쟁사상과 태우보우 스님의 통불사상을 통찰하시고
자신이 가진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길이요,
대중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길임을 깊이깊이 통찰하시고
이시대의 데바닷다가 되지 않으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근본 불교 만이, 대승 불교 만이 바른 불교라는 주장도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법집(法執)이라 합니다.
대승불교경전도 훌륭한 경전이고
근본불교경전도 훌륭한 경전입니다.
이제는 대승불교와 근본불교가 모두 힘을 합하여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바른 진리를 전해주도록 노력합시다.
저 집단적 광기를 번득이는 유일신을 믿는 자들에게
부처님의 바른 진리로 교화하도록 합시다.
이제 더 이상 교단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삼가도록 합시다.
근본불교 만세 !
대승불교 만세 !
우리불교 만세 !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불기 2555년 음력 8월 24일 (기묘)
(2011년 9월 21일)
개운선원(정토사)
정인(正印) 합장
출처 : 개운선원글쓴이 : 正印 (남광) 원글보기메모 :'행복의 문 - 법문, 좋은글 > ♣--남광 엣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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