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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훈-청담 불교분규 논쟁~
    불교 공부/불교의 이해 (남광 리포트) 2007. 12. 27. 18:58
    ◇ 조지훈- 이청담 불교 분규 논쟁을 생각하며~ 


    ◇ 목  차

     1. 서론

     2. 조지훈 - 이청담 불교 논쟁 요약

      (1) 한국불교 살리는 길

      (2) 하나의 오해(誤解)

      (3) 독선심(獨善心)의 장벽(墻壁)

      (4) 유문유답(有問有答)  

      3. 부처님은 중도주의를 실천하신 분이다.

       ◇ 극단적 원리주의 배격

       ◇ 대중화합이 더 귀중하다

     4. 결론

     

     1. 서론


       1963년 8월 12일, 13일 조 지 훈 씨가 동아 일보에 <한국불교를 살리는 길>이란 글을 올렸다. 조 지 훈 씨가

     해방 후 계속되어온 <불교 분규>를 가슴 아프게 여겨 불자의 한사람으로 이 분규를  지켜보다가 불교의 존립을

     위해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실었다.

      그는 대처나 비구의 어느 한편을 지지하지 않고, 양쪽 다 잘못된 부분은 지적하고, 또 서로 상반된 주장을

     화합하는 대승적인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1963년 8월20일 당시 조계종 중앙종회의장이던 이청담스님은 위 조 지 훈 씨의 주장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폄하해 버렸다.

       이에 대한 양쪽의 주장을 간략히 정리한 후 대중화합을 중요시하시던 <부처님 경전>을 인용하여 위 논쟁에

     대한 소감을 밝히고자 한다.


     2. 조지훈 - 이청담 불교 논쟁 요약


      (1) 한국불교 살리는 길

         (조 지 훈/ 시인, 종교단체심의회 의원/ 63년8.20.21.동아일보)

     ◇ 비구승 측의 선 정화 후 통합원칙은 대처승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법랍이 높아도 승려가 아니라 단순한

    재가 불자이므로, 이들을 정화시켜야 된다.

       또 대처승 측의 선 통합 후 정화는 분규이후 급조된 비구승들이 불교교리도, 의식도 모르고 선의 불립문자를

    방패삼아, 정규의 불경학습도 거치지 않은 자들이 교권을 농단하는 사실을 들어 그게 무슨 중이냐 라고 한다.


      ◇ 위 쌍방의 주장을 계속 고집하면 종단이 분단 될 수밖에 없다.     

      ◇ 불교분규의 발단은 지나치게 세속화한 불교의 정화문제로 발단되었고, 그 정화의 선결 문제로 승려의

     자격문제로 분열되었다.

      ◇ 필자는 비구승 측의 불교정화 요구를 원칙적으로 지지한다. 다만, 일본 식민지를 통하여 이미 1세기

     가까운 승려대처 허용의 풍토와 관습을 부정하고, 이 대처승을 단순히 일반 신도로 간주하는 것은 그 주장이

     독선이다.

      ◇ 마찬가지로 대처승 측의 불교의 대중화. 현대화란 시대적 요청을 지지한다. 다만, 지나친 세속화로 교화자의

     위의를 상실하고 특히 속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은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으므로 이러한 행위는 찬성할 수 없다.

      ◇ 현 단계에서는 불교정화는 대처승의 지나친 세속견제와 소생으로서만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 불교정화 원칙

      1) 독신. 대처를 막론하고 현재 승적에 있는 자의 승려로서의 기득권을 인정한다.

         독신 승을 수행승, 대처승을 교화 승이라 한다.

      2) 일체의 승직자는 사찰경내에 대처 세속 생활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는다.

         다만, 포교당의 포교사와 종립학교 교직원에 한해 예외를 둔다.

      3) 국가의 징소 또는 사회기간에 종사하는 경우 승려의 휴적제도를 둔다.

      4) 일체의 승려는 삭발해야 한다.

      ◇ 불교종단 통합원칙

      1) 단일종단아래 수행종단과 교화종단을 두되, 교화승은 독신. 대처를 불문한다.

      2) 승려별 등록을 실시하여 자유로 1승단 소속을 선택하게 한다.


    (2) 하나의 오해(誤解) - 63년 8월 20일, 21일

        - 조지훈 씨의 <한국불교 살리는 길>을 읽고- (이청담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 진리의 경우에는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진리를 위한 불교의 정화운동과 같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법전(法戰)에 한해서는 어느 편 주장이 정당한가가 문제이지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 조지훈 씨와 같은 속인(신분)들로부터 시비를 조장하지 말고 묵묵히 수행에 매진하는 길밖에 다시 다른 길이

    없음을 자각하시기 바란다.

      ◇ 승단의 영도권은 오직 승려에게 있는 것이요, 속인은 아무리 성자의 지위에 간 사람이라도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다. 대처승은 승려가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불교 종단의 재산은 승단의 부수물이요, 속인의 소유가

     아니다. 

       

    (3) 독선심(獨善心)의 장벽(墻壁)

         - 이청담 선사의 소론을 읽고 (63년 8월 29일, 30일 / 조 지훈)


       ◇ 통합에 대한 쌍방의 성의를 타진하려는 필자의 의도는 씨에 의하여 일고의 가치도 없는 냉소로 반응됨으로써

     이에 일방의 관문에서 거부되었다.

       ◇ 씨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이름의 아집을 방패삼아 철두철미 화동의 길을 거부하고 있다. 씨가 취한 필요

    이상의 의식적 고자세를 허물할 생각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씨가 성실한 검토와 교회(敎誨)가 아니고 감정적인

    흥분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 불교의 불법승 삼보의 하나인 승가는 화합이 가장 중요하다. 부처님은 이러한 승가가 화합으로 뭉칠 것을

     가르친 줄로 알고 있다. 분쟁이 있다 해도 관용과 양보로 타협해야 한다는 것이 보통인데,   <종교집단에서는

     무엇이  정이고 사인지를 가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타협은 있을 수 없고, 살벌한 법전(法戰)을 치룰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인정할 수 없다.


       ◇ 정화운동이란 이름하에 실제로는 쌍방이 다 집착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결국 사찰과 재산이 아닌가?

     이 살벌한 양쪽의 싸움에서 <병든 세상을 구원하는데 불교의 평화와 관용의 자비정신에서 광명을 찾으려던

     우리의 기대>가 무참하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4) 유문유답(有問有答)


       - 조지훈 씨의 두 번째 글을 읽고 -( 이 청 담) 


      ◇ 한국의 중진시인으로 씨가 우리 종단에 대해서 시비를 건다는 삼갈 줄 알아야 한다. 호법정신에서

     좌시하기 안타까워 꼭 충고를 하고 싶은 경우라면 종단의 기관지나 또는 은밀히 종단의 결의기관에 제의해도

     될 문제가 아니었겠는가?

      ◇ 씨가 우리 종단의 분규가 재산 싸움이라고 규정했으나 이는 정곡을 알지 못한 일이다.

     출가 승려로서 삼보정재를 수호하기 위한 정화투쟁을 재산권 투쟁이라고 판정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 씨의 언론자유도 존귀하지 않음은 아니나, 우리 종단에서 청탁하지 아니한 무풍기랑(無風起浪)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3. 부처님은 중도주의를 실천하신 분이다.


     ◇ 극단적 원리주의 배격

       붓다의 제자이자 사촌동생인 데바닷다는 극단적 원리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 교단 내에서

    계율을 엄격하게 지켜야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계율을 어기는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그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는 계율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한다는 주장을 폈고, 붓다에게 공개적으로 5가지 계율은

    꼭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부처님은 이제 나이도 많아, 계율도 지키지 않는 수행자들까지 다

    받아들이니 이제 교단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붓다를 공격하였다.


       이 말을 들으신 붓다는 “ 데바닷다여~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런 주장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에게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계율을 지키고 지키기 않는 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맡겨야 한다.” 또 “사리붓다

    같은 제자라면 몰라도 그대에게는 교단을 이끌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붓다는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극단에 빠지면 그것은 죄악이 된다. 특히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4. 결론

       비구-대처의 논쟁의 명분은 계율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불교초기 부처님 시대에 비교해 보더라도

     승려가 처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계율에 분명히 어긋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 불교가 일본 식민주의의 일환으로 이용되는 과정에서 대처승이 활성화된 것도

    역사적 사실이요, 또 하나의 관습이요, 불교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고쳐야한다고 이 청담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원칙은 맞다. 그러나 역사도 인정하고 사실인 관습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아닌가?

       일본에는 비구승과 대처승이 다 함께 각각 종단을 만들어 잘 지내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지 않은가?

      ● 이 청담의 주장은 부처님당시 부처님께서 지적한 <극단적 원리주의자>인 데밧다의 주장과 아주 일치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대중화합을 위하여 극단적 원리주의를 배격하셨다. 즉 맹목적 원리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대중이 불화하는 것 보다 대중화합을 더욱 귀중하게 여기셨다.

      그러므로 이 청담 등이 주장하는 불교정화란 미명하에 자행되었던 수많은 폭행, 상해, 살인 등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부처님께서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비폭력, 자비 행을 하라고 힘주어 설하지

     않았던가?

        이점에서는 이 청담 등 불교 개혁자들은 엄중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한다고 본다.

     ● 초기불교에서 수많은 불교의 전법자들이 비구나 비구니와 같은 수행 승 외에도 우바이, 우바새들이 많은

    전법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단지 결혼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승려라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 동진출가를 한 승려도 많았지만, 과거에 결혼하고 자녀를 두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혼 못하고,

     승려의 길을 간 사람이 과거에도 얼마나 많았는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조사 스님들이

     처자를 둔 채 그 얼마나 출가를 하였던가?

     ● 그러나 조 지훈 씨가 지적한 것과 같이 “사찰 내에 처를 두고 음행을 한다는 것은 안 된다.”는 주장은 옳다고

    본다. 물론 교화승의 길을 간다고 해도 승려는 틀림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삭발염의하고 부처님을 모시고

    대중교화의 일을 하면서  사찰 내에 처자를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 그렇지 않고 처자와 꼭 함께 거주해야한다면 승려의 신분을 포기하고 재가 전법사로서 행하는 것이 정말

    맞지 않겠는가? 부처님 당시 무수한 우바이, 우바새들이 전법활동을 하였듯이. 또 부설거사나 중국 방 거사 같이

    살아도 또 좋지 않을까? 

       불자들의 손가락질 받아가며, 절에서 머리 기르고, 술 먹고, 고기 먹고, 처를 거느리고 살아가는 것이 승려

    된 자의 도리로 과연 마땅한 일일까?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스님들의 나쁜 행동을 보고 욕하게 하는 >구업을

    더 이상 짓게 하여서는 안 된다.

       63년 조지훈 씨의 <불교정화 방안>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이제 교화승을 표방하는 스님들은 모두 겸허하게

    한번 자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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