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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오해(誤解)와 착각(錯覺)
    행복의 문 - 법문, 좋은글/♣--생활법문 2012. 4. 20. 09:43

     

     

    오해(誤解)와 착각(錯覺)

     

     

     

     

    불자님들

    오늘은 일상생활이나 나아가서 불교수행에 있어서도

    오해(誤解)와 착각(錯覺)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므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1] 오해(誤解)와 착각(錯覺)의 현장

     

    ◇ 어떤 사람이 물건을 사려고 이마트 입구로 들어가는 데 입구에 어떤 험상궂은 얼굴을 한 키고 어깨가 떡 벌어진 거구의 사나이가 돈을 가득 넣은 지갑을 쫙 펼치며 “신문 구독하면 이 돈을 선물로 드립니다.”라고 다가섭니다.

     

    그러자 물건을 사러왔던 사람은 ‘이 사람이 나를 협박하는 구나!’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물건을 다 산 후 문을 나서는 데 또 그 큰 거구가 아까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자, 신문구독하면 이 돈을 선물로 다 드립니다.”하고 다가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사러왔던 사람이 짜증스런 말로 “구독 안 해요. 안 해. 사람 봐 가면서 이야기 해야지”하면서 갑니다. 이 말이 떨어지지 말자 그 큰 거구가 “야, ××놈아 구독안하면 되지 왼 짜증이야. 한 주먹도 안 되는 것이.”라고 하자

     

    물건을 사러 왔던 사람도 지지 않고 “야, ××새끼야 눈에 보이는 것이 없냐.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욕을 하고 있어. 너는 부모도 없냐. 아까 들어 갈 때 분명히 내가 신문구복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이런 건방진 놈” 그러자 이번에는 덩치 큰 거구가 “이게 죽을려고 환장했나. 야, ××놈아 네가 들어가고 가는 것 나가는 것 내가 어떻게 안다고. 이걸 그냥 물총 한방 놓아 버려..”라고 하면서 드디어 서로 목을 조르고 하며 일촉즉발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마침 주변에서 순찰하던 순경이 이 모습을 보고 가까스로 싸움을 말렸기에 불행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이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스님이 그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전체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생활에 무수히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심하면 상대를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 간에는 물론 사회 각계층간 심지어 종교간 종파간 더 나아가 국가 간에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오해(誤解)와 착각(錯覺)으로 빚어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위 사건에서 먼저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은 자신이 과거에 덩치 큰 사람으로부터 신체적 위해나 아니면 금전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모습을 떠올려 ‘신문 구독 영업을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오인할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협박하여 강매를 시키려고 한다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덩치 큰 거구의 사내는 그냥 지갑에 돈을 넣어 아무나 보고 열심히 ‘신문 구독 영업 홍보’를 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물론 그 큰 덩치에 건달 같은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위압감을 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그러한 것을 전혀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매를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행동이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상대의 말이나 행동은

    모두 사리에 어긋난다고 못을 박아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나 말은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생각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욕하고 헐뜯고 싸우고 심지어 죽이고 하여 괴로워합니다.

     

     

    ◇ 이러한 오해(誤解)나 착각은 일상생활은 물론 종교생활 등 사회 각 분야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 진리가 언어(言語)로 100% 전달될 수 없는 것인데 이를 오해(誤解)하고 착각(錯覺)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 불교 내에서도 이러한 문제로 부처님 입멸 후 그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위없는 큰 깨달음을 여신 후 그 내용이 너무도 심오하고 방대해서 처음에는 중생들에게 그 가르침을 펴시는 데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비심을 발하여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의 근기가 천차만별임을 잘 아시고 근기에 따라 차제 설법을 펴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일부 학자들이나 불자들이 잘 알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설법을 펴려고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2] 중생의 근기에 따른 가르침

     

    (1) 아함경의 가르침

    자 이때 어떤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사람들이 ‘탐심과 소유욕’에 눈이 어두워 제 것만 챙기려고 합니다. 주지 않은 것을 탐하기도 하고 심지어 빼앗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합니다.

    이러한 근기를 가진 사람에게 부처님께서는 ‘세상은 덧없는 것이며, 이 세상은 모두 인연에 의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다. 나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가 의지해서 있다. 그래서 나라고 주장하고 집착할 것이 없다. 모두가 같은 뿌리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나누어 주라.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하라.’이렇게 가르친 것이 바로 <아함경>입니다.

     

    <아함경>의 요지는 탐심과 소유욕이 눈멀어 자기 것만 고집하는 자들에게

    ‘남에게 나누어 주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 아함경은 무상의 원리와 무아의 실천, 인연과보의 도리를 주로 설해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불교를 배우는 사람은 아함경을 배우면 쉽고 바른 수행의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즉 아함경은 사람의 마음의 도리를 알고 마음을 써는 방법을 상대적인 원리에 의해서 쉽게 설명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즉 착한 일은 하고 악한 일을 하지 마라. 좋은 일은 하고 나쁜 일은 하지 마라. 즐거운 일은 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하지 마라. 이렇게 상대적인 개념 속에서 교훈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인과의 도리를 설명하여 착한일 하면 착한 보를 받고 악한 일을 하면 악한 보를 받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2) 방등경의 가르침

     

    아함경의 말씀을 듣고 착한 일하며 악한 일을 하며 오순도순 잘 살아가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착한 일을 해도 이생에 살기가 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에 의심을 품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인과가 잘 맞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이생에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나쁜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자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인연법으로 방등경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은 과거 전생에 지은 악업이 이 세상에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좋은 일을 하면 금생이나 내생에 반드시 그 착한 보를 받는다. 반대로 이생에 악행을 저지르면 이생에 보를 받아 감옥가거나 아니면 내생 에 반드시 악도에 떨어져 그 과보를 받게 되느니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방등경에서는 좋은 인연을 만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나쁜 인연을 만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데 그 인연을 누가 짓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좋은 인연도 나쁜 인연도 자기가 만들어 가기 때문에 방등경에서는 이렇게 인연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방등경(方等經)에서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에 의한 인연법을 가르쳤습니다.

     

     

    (3) 반야경의 가르침

    우리들은 남에게 나누어준다는 행위를 하고 있으며, 사성제 팔정도에 의해 충실히 그 가르침을 따른다는 아만심에 가득차기 쉽습니다. 즉 자신이 한 일에 생색을 내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 마음이 아만심입니다.

    아함경을 배운 사람은 위 동네 이야기에서는 첫 앞산 봉우리에 올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스스로 아만심에 가득차서 그 봉우리가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집착하고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 봉우리가 정상이 아니므로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에만 집착하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들은 아함경에 의한 봉우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다음의 봉우리로 올라갑니다. 정상의 산봉우리는 자신이 한 일에 생색을 내지 않는 곳입니다. 즉 아만심을 버리고 보시를 하고도 상을 내지 않습니다. 중생들에게 아함경을 가르쳐주고도 ‘가르쳐 주었다.’라는 상에 머무르지 않고 오직 중생을 살리는 일에 모든 일을 다 할 따름입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열반을 위해 닦으며 한편으로는 중생을 살리고 제도할 따름입니다. 그들은 이미 큰 지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반야경은 성문들이 머무는 첫 산봉우리에서 최종산봉우리에 이르게 도와주는 경입니다.

    이 반야경에는 <금강경><반야심경>이 있습니다. 다 집착을 버리고 아만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특히 <금강경>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에서 보시를 하되 보시를 했다는 상을 내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만심을 깨뜨리기 위해 ‘나눠 주라.’고 했던 가르침마저 부정한다. 즉 아만심을 갖고 나눠주는 것은 나눠주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고 무섭게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아함경에서 인과를 설하고 방등경에서 인연법을 설하다보니 중생들이 이 인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인과의 인연이 도대체 무엇에 의해 짓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밝은 마음을 가지면 밝은 마음을 가지고, 어두운 마음을 가지고 인연과 인과를 지으면 어두운 세계가 되기 때문에 지혜가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반야경을 설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에서는 지혜가 중심이 된 것

    입니다.

     

    이경을 수지 독송하면

    결국 무아(無我)의 도리를 깨우쳐 자신을 낮추고 어떠한 욕망에도 끄달리지 않고 어떠한 상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이 경을 수지 독송하여 그 뜻을 깨우치면 ‘나’라는 아상에서 벗어나 남을 위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열립니다.

    그리고 절에 보시를 하고도 보시하였다는 상을 내지 않으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복을 구걸하기 위해 절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지혜를 얻으면 세상을 사는데 걸림이 없고 나와 나 모두가 대립이 없이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법화경의 가르침

    위에서 마지막 정상인 지혜의 봉우리에 올라선 사람도 큰 지혜는 열렸으나 아직 중생을 위한 완전한 실천보다는 혼자의 기쁨(법열)에 더 젖어 있는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보살의 실천을 행하라는 메시지가 바로 <법화경>이요, <정토경>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왜 저 높은 정상으로 올라가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산에서 살라는 것도 아니요, 지혜의 기쁨에 머물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다시 마을에 돌아와서 다함께 잘 살기를 위해 실천할 것을 독려한 깨우침입니다.

    즉 법화경은 성문, 연각, 보살이 모두 불성(佛性)을 깨우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임을 설하고 있는 경전입니다.

     

    ※ 성문 : 부처님의 진리를 배우는 수행자

    ※ 연각 : 연기의 도리를 깨우친 수행자

    ※ 보살 : 부처님의 진리와 연기의 도리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여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수행자

     

     

    성문, 연각, 보살은 결국 지혜의 마음에서 불국토를 건립하고자 합니다.

    이 지혜로운 마음에 의해서 건립된 이 세계는 그대로 진리의 세계라고 합니다.

    이 세계를 이야기 한 것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즉 법화의 도리를 증명한다면 그 대로 이 세상이 바로 실상의 세상이 되고 열반의 세상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법화경의 화(華)자도 마음을 뜻하고 있으므로

     

    결국 마음의 도리를 설한 것이 법화경입니다.

     

    ● 이 법화경에는 그 유명한 관세음보살 보문품이 있는데 이를 보통 관음경이라 합니다.

    이 경의 요점을 잘 살펴보면 내 마음이 관세음보살과 같이 자비롭고 평등한 마음을 가지면 이 세상에 어떠한 어려움이나 난관이 와도 두렵지 않고 잘 극복할 수 있다는 내용을 설하고 있습니다.

     

     

    (5) 화엄경의 가르침

    화엄경은 <아함경>에서 <법화경>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서로 다른 단계의 내용을 하나로 묶어 보인 경전입니다.

    위 동네 이야기에서 앞산이야기 최고 정상에 이르는 이야기 그리고 다시 마을에 내려와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며 다함께 살사는 불국토에 이르는 이야기를 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 마을과 산이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이세상과 같은 세계가 삼천대천세계나 있음을 전 우주적인 차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세상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방대하고 심오합니다.

     

     

    ● 화엄경 은 원명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성도를 하신 후 21일 사이에 겪은 일을 제자들에게 설했지만 그 내용이 심오하여 20년 간 먼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아함경]을 설하신 것입니다.

     

    화엄경을 쉽게 설명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의 꽃으로 이루어졌다는 도리를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광대무변한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의 꽃으로 장식되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바로 화엄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이 마음의 도리를 잘 모르고 또 마음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그 방법을 상대적인 원리에 의하여 쉽게 설명한 것이 아함경입니다.

     

    부처님의 성도 후 최초로 설해진 경전이지만, 중생들의 근기가 낮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아함경] [방등경] [반야경] [법화경]을 설한 뒤 마지막으로 다시 [화엄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화엄경은 인과와 인연의 도리, 지혜와 실상의 도리를 배우게 한 뒤 제법실상이 아름다운 꽃으로 건립이 되었는가를 마지막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만을 뽑아서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무심히 피어있는 이름 모를 잡초들까지도 모두 다 포함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을 일명 『잡화경(雜華經)』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화엄의 이치를 깊이 터득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귀하고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체가 평등하다는 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 어느 하나 부처의 성품 아닌 것이 없음을 알고, 각 사람들의 개성을 다 존중할 줄 알며 동시에 ‘나’라고 내세울 것도 없고, 또 일체가 다 마음으로 짓는 도리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중생의 바라는 바 욕망으로 부터 모든 고통과 번뇌가 생기고, 번뇌가 있으므로 삶과 죽음이 끝없이 윤회하여 계속하게 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과 번뇌를 없애려면 결국 바라는 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철저하게 아는 것입니다.

     

     

     

    [3] “참나”의 의미에 대한 오해(誤解)와 착각(錯覺)의 현장

     

    오해(誤解)란 사전적 의미로 도리에 어긋나게 풀어보는 것

    또는 뜻을 잘못 앎 또는 그릇 해석함으로 되어있습니다.

    착각(錯覺)이란 잘 못 깨닫거나 잘 못 생각함을 말합니다.

    다음은 “참나”에 대한 해석에 대한 견해차로

    상대방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현장을 소개합니다.

     

     

    ◇ 다음은 미디어붓다 이학종 기자가 2012.04.02자로

     

    “‘참 나’ 찾으라는 종정의 법문

    부처님의 연기·무아 가르침에 위배”

    이제열 법사, 조계종정 진제스님 법어 강력 비판

    “종정설법이라도 묵과 못해…佛法內外道’ 아닌가” 제목으로

     

    조계종 종정에 추대식에서 말한 진제(眞際) 큰스님의 법어 중 ‘참나’라는 의미를

    자신이 알고 있는 기준으로 해석하여 진제스님을 포함한 많은 큰 고승대덕은

    물론 육조 혜능스님 조차도 욕보이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아만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왜 그러한가?

    먼저 다음은 기사내용 전문을 인용합니다.

     

     

    ◇ 진제스님의 ‘참나’라는 말씀에 대한 이재열 법사가 알고 있는 소견

    “조계종 종정에 추대식에서 말한 진제(眞際) 스님의 법어를 듣고 크게 놀랐다. 종단의 대덕과 내외 귀빈, 불자들이 대거 동참한 자리에서 나온 진제 종정의 법어는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제란, 참 진리의 세계를 말하는데 법문을 들어보니 참 진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날 진제 종정의 법문의 요지는 참 나를 찾으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는 참 나를 찾는 종교가 아니다. 참 나든, 진아든, 주인공이든, 또는 본래면목이든 무엇인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끄는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법림법회를 이끌고 있는 적연 이제열 법사가 조계종 새종정 진제 스님의 추대식 법어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한 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되지 않는 외도들의 법문이라는 것이다.

    이제열 법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장자종단 조계종의 법통을 상징하는 종정이 추대법어에서 참 나를 찾으라고 강조하는 법문을 한 것은 정말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법문은 부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연기(緣起)와 무아(無我), 무상(無常), 중도(中道), 공(空)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불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무리 종정스님이라도 이런 법문을 한 것은 도저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사실상 불법내 외도(佛法內外道)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제열 법사는 “왜 법문에 아(我)를 붙여야 하는가. 부처님께서 그토록 경계하신 아(我)를 말하는가. 우리에게는 오온만 있을 뿐 오온을 이끄는 주체나 영원불멸하는 생명이나 근원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강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저 외도들이 주장했던 진아, 근원, 유일자 따위를 상정하여 설법용어로 사용한다는 것은 반불교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며 “혹시 진제 선사는 불성이나 대승의 진여심, 혹은 본각 등의 용어들을 오인하여 중생의 마음 속에 죽지 않는 어떤 생명 원리가 과거 현재 미래로부터 감춰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설법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설법은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의 존재구조인 오온과 12처 18계 등의 기본 교리도 모르는 데서 나오는 무지한 설법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이 법사는 이어 "그런 주관적 설법이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제열 법사는 이같은 법문은 지난 4월 1일 동국대 대각전에서 열린 제10회 법림 대중법회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제열 법사는 이날 법회에서 “조계종 종정 진제스님이 추대식에서 한 법문 내용 중 ‘참 나’를 찾으라는 내용을 거듭해 강조한 것에 대해 불교의 근본교설인 연기, 무아, 중도, 공에 어긋난 것”이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연기를 보는 자 여래를 본다’는 주제로 열린 이날 법회에서 이제열 법사는 “내가 40년 가까이 불교공부를 하면서 그 어느 경전에서도 참 나를 찾으라는 내용을 본 적이 없다”며 “부처님은 참 나를 찾는 인도 바라문들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무아를 진리를 설파하신 분”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과 상반된 법문이 다른 자리도 아닌 종정추대법회에서 종정 스님이 했다는 점에 충격을 금할 수 없다”고 밝힌 이제열 법사는 “한국불교의 현실이 이러한데도 종단의 선지식이나 대덕스님들, 불교학자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더 큰 충격”이라고 꼬집었다.

    “이제열 법사는 진제 종정 외에도 한국불교계에는 ‘참 나’ 법문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그러나 조계종의 종정스님이 많은 대중의 이목이 집중되는 추대식 법문에서 참 나 법문을 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수행하며 전하는 입장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 작심발언의 배경을 밝혔다.

     

    이제열 법사는 “남방불교에서는 정법이 아닌 설법을 하는 비구가 있으면, 이를 바로잡는 호법부의 기능이 살아 있다. 비법을 설한 비구를 불러 그 법문이 어느 경전에 근거하는가를 묻고, 그 법문이 부처님께서 설한 교법과 같으냐, 같지 않느냐를 따져 바로잡는 기능을 말한다”며 “그러나 우리나라의 불교에는 안타깝게도 정사를 가리는 이러한 기능이 오래 전부터 상실되어 있다”고 개탄했다.

     

     

    그러면 이제열 법사의 주장이 과연 타당한가?

     

     

    [4] “참나”란 무엇인가?

     

     

    (1) “참나”의 정의

    먼저 “참나”는 한자로 진아(眞我)라 보면 틀림이 없겠습니다.

    운허(雲虛)스님이 지은 불교사전(동국역경원)을 살펴보면

     

     

    “ [진아(眞我)]란

    ① 대아(大我)로 실아(實我)와 가아(假我)와는 반대가 되는 말이며,

    열반에 갖추어져 있는 4가지 덕(德) 중의 하나가 진아(眞我=大我)이다.

    열반의 체가 변경되지 않고 진실하며, 그 작용이 자유 자재한 점으로 보아

    아(我)라고 표현한 것이다.

    ② 외도와 범부들이 실아(實我)라 할 것을 진아(眞我)라고도 한다.”

    위 불교사전의 정의에서 보면

     

     

    1) 불교에서 진아(眞我)는 열반에 갖추어져 있는 4가지 덕(德)중의 하나인

    아(我)란 ‘망아(忘我)를 여윈 진아(眞我)를 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아(實我=아트만)와 가아(假我)와 반대 되는 말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리고 외도와 범부들이 ‘실아(實我)라 할

    것을 진아(眞我)라고도 한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같은 진아(眞我)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眞我)와 외도나 범부들이 말하는 진아(眞我)는

    그 의미가 180도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의미는 열반 4덕 속에도 뚜렷하게 나와 있습니다.

     

     

    (2) 열반4덕(德) 속의 아(我)란?

    [열반(涅槃)]이란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진리를 궁구하여 미(迷)한 생사를 초월해서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다.

    대승에서는 3덕 또는 4덕을 갖춘 열반을 말하며, 실상(實相), 진여(眞如)와

    같은 뜻으로 본체(本體) 혹은 실체(實體)의 의미로도 쓴다.

     

    [4덕(德)]

    ① 대승의 대열반(大涅槃)에 갖추어져 있는 4가지 덕을 말한다.

    1. 상(常)은 상주의 뜻이다. 대열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멸의 변화가 없는 덕이다.

    2. 낙(樂)은 안락의 뜻이다. 생멸의 변화가 없는 세계는 생사의 고뇌가 없는 무위안락(無爲安樂)한 덕이다.

    3. 아(我)는 망아(忘我)를 여윈 진아(眞我)를 말한다.

    8대 자재(大自在)를 덕을 갖춘 아(我)를 표시하는 것이다.

    4. 정(淨)은 청정의 뜻이다.

     

     

     

    [8대자재아(八大自在我)]

    열반4덕의 아덕(아덕)에 8가지 대자재(大自在)를 말한다.

    능시일신다신(能示一身多神)

    시일진신만대천계(示一塵身萬大千界)

    대신경거원도(大身輕擧遠到)

    현무량류상거일토(現無量類常居一土)

    제근호유(諸根互有)

    득일체법무득상(得一切法無得想)

    설일게의경무량겁(設一偈義經無量劫)

    신변제처유여허공(身遍諸處猶如虛空)

     

     

     

    (3) 청화(淸華) 대선사의 법문 : 상락아정[常樂我淨],

    다음은 청화(淸華) 대선사의 법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우리 불성에 들어있는 무한공덕(無限功德) 자리인 상락아정(常樂我淨),

    상락아정 이것이 열반사덕(涅槃四德)그럽니다. 열반 이것은 영생 행복한 생활이 열반인데 열반에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지만 간추리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덕(四德)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말입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정말로 한시도 잊지 마시고 조금 조금 괴로우시더라도 아, 나한테는 만능(萬能)이 원래 갖추고 있는데 만능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참선(參禪)하고 염불(念佛)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화두(話頭)하는 사람은 화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부처님, 부처님을 믿을 때는 역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이 가장 이것이 가장 쉽습니다. 본래 부처인데 본래 부처인 부처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니까 부처님 외우는 것이 제일 속 빠릅니다.

    내가 나를 부르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내가 나를 부르고 또는 우주의 이름도 내내야 아미타불입니다, 우주의 이름도. 우주가 모두가 다 불성으로 되어 있거니 불성의 대명사가 아미타불인 것이니까 불성(佛性)한테는 우주 역시 아미타불입니다.

     

    또 극락세계(極樂世界)는 무엇인가? 극락세계도 내내야 불성(佛性)으로 되어 있거니 극락세계의 교주도 역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여기나 저기나 내 몸이나 내 마음이나 본래는 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인 것이고 우주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천지 우주의 바로 생명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것은 또 어렵게 한다 하더라도 가장 쉽고 누구나 하기 쉽고 또 공(功)도 제일 많은 그런 것이 염불(念佛)공부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셔서 꼭 금생에 열반사덕(涅槃四德)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4) 혜능선사의 금강경 해석

     

    ‘묘용자(妙用者) 즉재오원적지시 진아야(眞我也)...’

    ‘즉 묘한 작용은 깨달음 시에 나타나는 진아(眞我)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혜능선사가 금강경을 해석하는 가운데서 한 말입니다.

    깨달음 시에 나타나는 진여불성이 바로 진아(眞我)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체(體)와 용(用)을 동시에 구족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체와 용을 지닌 ‘진여불성’이 ‘참나’란 것입니다.

    물론 이 나(我)는 우리들 중생이 흔히 생각하는 나(=實我)나

    거짓 나(假我)로서의 나(我)가 아니고 참나, 진아(眞我)를 뜻합니다.

    이렇게 혜능선사는 ‘참나’인 진아(眞我)를 말하였습니다.

     

     

     

    [5] 결어

    (1) ‘참 나’는 망아(忘我)의 자리요, 무아(無我)이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참 나’인 진아(眞我)는 거짓된 망아(忘我)를 여윈 자리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일체의 시비와 분별을 그친 자리로 고요하고

    안락한 마음의 상태요 일체의 번뇌에서 벗어난 경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번뇌를 모두 벗어난 경지를 열반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열반은 철저한 인연과법의 수행을 통하여 증득한 것이요, 그 증득은 이교도들이 말하는 창조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 경지에 도달한 많은 아라한이나 역대 조사들, 큰 스님들이 기라성같이 많은데

    모든 성현들은 이구동성으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그와 같은 자성(佛性)을 바라 볼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2) ‘참 나’의 첩경은 아만심(我慢心)을 조복하는 일이다.

     

    그러면 무엇이 ‘참 나’인가요? 참 나란 불성의 자리요, 열반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니 무아(無我)를 체득한 것을 말합니다. 무아(無我)의 체득이란 먼저 아만심과 아치심(我癡心)이 없어야 합니다. 아만심은 자신의 생각이 바르고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르고 틀렸다고 보는 생각에 깊이 빠져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아만심은 마음공부에 가장 나쁜 것입니다.

    아치심(我癡心)은 생각이 한쪽으로 편협 되게 달리고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중도

    와 거리가 먼 것을 말합니다. 즉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사람의 근기에 따라 각각 다른데 그 것을 중도라고 하는데, 아치심(我癡心)은 오직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수행을 충분하게 하지도 않고 오직 문자공부나 글을 읽고 외운 후에 자신이 아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에 집착한 사람은 아만심(我慢心)이란 병에 걸려 있습니다. 즉 자기 생각이 옳고 잘났다고 생각하는데 집착하는 병이 걸린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특히 아함경(또는 근본경전)만이 최고 경전이요, 진리라는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고집을 하는 자들을 예로부터 소승의 무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아(眞我)에 대하여 불교 사전조차도 공부를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것조차도 무시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眞我)를 힌두교에서 말하는 진아의 가르침이나, 심지어 기독교의 신과 같다고 합니다. 즉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트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과 같다는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대승불교 핵심이 기독교와 같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리에 대한 크나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도를 가르쳤습니다.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 깨우치신 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차제설법을 하셨으며

    그 궁극목적은 열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열반에 도달하려면 아만심(我慢心)부터 조복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만심이 극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을 마장(魔障)에 들었다고 합니다.

    마치 일부 종교의 성직자가 자신은 아만심과 이기심으로 나쁜 행동을 수없이 저지르고 있지만 입으로 설교만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불교의 일부 지도자들이 목사와 같이 수행을 하지 않고 아만심만 키워 입으로 설법만 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우리불교의 장래에 큰 우려가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만 동원하여 마치 목사가 이교도를 공격하듯 똑같은 모습으로 대승불교를 물어뜯고 있는 것입니다.

     

     

    6조 혜능 선사(禪師)가 말하는 진아(眞我)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체(體)와

    용(用)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체(體)와 용(用)에서 만일 용(用)에만 치우친다면 이것은 유물론입니다.

    반면에 체(體)에만 치우친다면 이것은 유심론이 됩니다.

     

    이 유심론을 인격화하면 그것은 유신론으로서 기독교나 이슬람교, 힌두교와 같은

    유일신과 같이 됩니다.

     

    그렇다고 체(體)와 용(用)을 모두 부정한다면 이것은 허무론이 됩니다.

    이들은 모두 진실의 한 면만 본 것으로 중도와는 거리가 먼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그러나.

    선사(禪師)는 위의 글에서 진여불성의 체와 용을 함께 말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사의 이 진여불성은 중도불성의 자리를 말합니다.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 중도의 불성이며, 그것이 참나 ‘진아’인 것입니다.

    즉 가아(假我=實我=이기적인 나 )는 본래 없지만, 무아(無我)를 체득하여 알아차리는

    경지는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무아의 체득이 바로 진아(眞我) 인 것입니다.

     

     

     

     

    (3) 진아(眞我)는 체득해서 깨닫는 것

     

    다시 말해서 진아(眞我)는 체득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자

    (문자 병에 걸린 자, 머리만 굴리는 자, 아만심에 가득한 자)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이야기고자 합니다.

     

     

    자 어두운 방이 있고, 그 방에 처음으로 들어가 방을 더듬거리며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방에 들어가 ‘그 방이 어떻게 생겼을까?’하고 온갖 생각을 짓고

    또 어떤 것을 만져보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온갖 생각을 짓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자로 보고 생각하되, 아직 깨닫지 못 한자의 행위와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된 망아(忘我)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로 불을 확 켜보면,

    바로 방전체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 단번에 방의 사정을 다 알게 됩니다.

    이때 확연히 방 전체를 알아차리며, 말로 표현할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이런 저런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아하’하고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깜깜한 방에서 온갖 생각을 해도 알 수 없었던 것이

    불을 켜니 한 순간에 ‘알아차림’하여 체득하는 것이 바로 거짓된 망아(忘我)를

    벗어나는 길인 것입니다.

     

     

    무명의 어리석음을 벗고, 아만심을 진정으로 조복 받으면, 바른 정견(正見)이

    나타나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안목(지혜)가 생깁니다.

     

    그리고 백두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오직 내가 가는 한 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우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도 아만심을 내어 자신의 주장에 빠진다면 어쩔 수 없이

    금생에는 깨우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과 모든 아라한과 훌륭한 역대조사, 선사님들의 간곡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아만심을 쳐부수어야 바른 눈이 뜨인다.

    아만심은 나를 고집하고 내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라네.

    세세생생 이어온 두터운 업 그것이 제7식의 자아심이네.

    이 세상에서 ‘내가 옳다.’라는 생각만 내려놓아도

    세상에 시비가 없고, 투쟁이 없을 것이며, 도를 저절로 이루리라.

     

    무아(無我)를 완강히 부인하고 아만심을 불타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네.

     

     

    무아(無我)를 머리로만 생각 말고

    진실로 사무쳐 깨달으면

    중도의 자리가 보이고

    그동안 무지한 나를 참회하고

    부처님과 역대 수많은 아라한과 역대조사님과 고승대덕에게

    스스로 참회할 것이라네.

     

     

    “음, 내 생각이나 지식이 너보다 뛰어나다.”라는 망상(妄想)에서

    벗어나야 한다네.

     

    연기(緣起)와 무아(無我), 무상(無常), 중도(中道), 공(空)의 가르침을

    머리로 굴리거나 입으로 앵무새처럼 외우지 말고

     

    말없이 행동하며, 진실로 한 없이 겸손해 지는 것이

    바로 몸으로 연기(緣起)와 무아(無我), 무상(無常), 중도(中道), 공(空)을

    실천해야 된다네.

     

     

    그 자리에 서면

    진실로 겸허하고, 자신을 낮추게 되며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며

    서로 오순도순 사이좋게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이 되리라.

     

    그 자리에 서면

    ‘외도다. 아니다.’, ‘근본불교다. 대승불교다.’

    ‘참 나’가 불교다, 아니다.라는 일체의 시비가 없어지리라.

     

    일체의 시비가 없으면서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전체 속에서 부분을 다 인정해주고

    부분은 전체를 존중해주는 자리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같이

    모든 구성원이 다 자신의 소질을 최고로 발휘하되

    전체로서는 잘 조화를 이루는 사회

     

    그러한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사회요, 화엄세계요, 정토요,

    불국토가 아닐까요?

     

     

    이 모든 것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것

    그것은 무아(無我)요,

    이 무아(無我)를 위해서

    아만심(我慢심)과 아치심(我癡心)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네.

     

     

    감사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정토사(개운선원)

     

    정인합장

     

    2012년 4월 20일

     

     

     

    출처 : 개운선원
    글쓴이 : 正印 (남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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