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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 집착 없는 마음이 정토 "(269)
    행복의 문 - 법문, 좋은글/♣--생활법문 2016. 4. 10. 17:24




    " 집착 없는 마음이 정토"

      신해행증의 실천적 삶

      일체중생을 부처로 보는 삶


    #

    산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합니다.

    계곡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능선으로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산이 클수록 등산로도 많은 법입니다.

    그러므로 성불의 길도, 불국토를 이루는 길도 중생의 수만큼 다양합니다.

    중생 각자가 불성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각자가 인연 따라 부처의 길을 닦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오르는 것이 목적이지만

    오르고 나면 다시 내려오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목적은 어느 쪽으로 몸을 돌리느냐에 따라 바뀌게 마련입니다.


    불자가 부처님께 귀의해 배우고 행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불교는 해탈을 목적으로 합니다.

    일체 번뇌 망상을 여의고  해탈하여 궁극에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산 정상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번뇌 망상을 여의고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도 여러가지 길이 있습니다.


    간경, 염불, 참선, 사경, (), 명상(위빠사나) 등의 정진으로

    해탈열반의 산에 오르기도 합니다.


    이 때 사람들이 그 목적에 도달할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방법을 찾으면

    더 없이 좋습니다.


    그리고 산 위에서 청정한 마음과 큰 지혜와 자비의 마음을 얻어

    이제 산아래도 내려갑니다. 


    산아래에 내려가 봉사활동, 복지사업, 캠페인 전개 및 동참, 이웃돕기,

    장학사업 등으로 산꼭대기의 시원한 바람을 이웃에 전하기도 합니다.

      

    목적지 없이 항해하는 배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절에 다니는 이유가 다르겠지만,

    절에 와서 함께 지향하는 목적이 있을 때

    기도와 정진에 힘을 얻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각각의 사정이 있지만 향하는 목적지는 같은 것처럼,

    같은 절에 다니는 불자들도 공동으로 갖는 원력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아무렇게나 와서 각자 마음대로 공부하고 기도하라고 한다면

    절은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습니다.


     자비불교정토회에서는

     바르게 믿고()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실천하고() 바르게 깨닫자()’

     신해행증(信解行證)’것을 공동의 지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해행증을 구체화 하는데 한 순간도 게으르면 않됩니다.

    그로써 불자들의 지침이 되고 모범이 되어

    기도정진과 각종 나눔 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해행증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않됩니다.

      

    # 믿음[]

    ()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종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가르침을 따르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데 불사에 시주하고 발원하여

    기도붙이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 간에도 믿음이 중요하고 회사나 단체에서도 믿음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믿음이 사라지면 불행해 집니다.


    <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

    [信爲道源功德母]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모든 좋은 것들을 길러내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결과를 좋게 하는 믿음과 나쁘게 하는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신의를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의 말에 속아 그 실체를 모르고 잘못된 것을 믿었다가

    화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과를 좋게 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바른 눈,

    혜안(慧眼)이 있어야 합니다.

    혜안을 갖추기 위해서는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개인과 개인의 사소한 관계에서 조직과 조직,

    국가와 국가의 유기적인 관계도 모두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믿음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허방다리를 밟으면 불행의 구덩이로 빠져버리게 됩니다.

    허방다리가 아니라 단단한 믿음의 다리를 고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어리석음만 더 하여 결국 구덩이에

    빠지게 합니다.

    반대로 알기는 하되 믿지 않으면 아만심만 더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바르게 아는 해(解) 필요합니다.


    # []

    ()는 바르게 아는 것인데

    이는 지혜(智慧/반야)로 가는 길입니다.

    바르게 알기위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집착 말입니다.

    그릇된 견해는 대개 아집(我執)에서 비롯됩니다.

    아집을 버리고 나면 사물이나 어떤 일의 이치가 보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난 마음을 중도의 마음이라 합니다.


    입고 있으면 옷이고 세탁기에 들어가면 빨래라 합니다.

    그것을 나누어 어떠어떠한 천으로 어떤 디자인을 어떻게 재단하고

    마름질하여 만들었다는 것까지 분석해 냅니다.

    그냥 옷이라고 하는 이 하나의 물건에도

    이렇게 많은 측면이 잇는 겁니다.

    어디를 보고 무엇을 말하는 것이 옷이라는 물건의 참모습일까요?


    <금강경>에서는

    소위 불법이란 것은 불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불법일 뿐이라고 했잖습니까?

    우리는 그 이름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 우선 집착을 버려야 하고

    다음으로는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여 철저한 깨달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해도 아는 것이 바르지 못하면 맹신(盲信)이나

    미신(迷信)에 떨어집니다.

    바른 믿음을 지켜 주는 것은 바른 깨달음이고

    바른 깨달음은 각종 상()에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혜(반야)라고 합니다.

    불교는 바로 지혜와 자비의 종교입니다.

    안으로 나를 닦고 밖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정진과 나눔의 생활화로

    늘 깨어 있는 도량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세상에 회향될 때 참 가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부처님 다운 것은 바로 회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아는 힘이 생겼으면

     이제는 이를 실천(行)해야 합니다.

     

    # []

     

    ()은 그냥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에 의거해 법에 맞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많아도 행하는 것이 없으면 세상에 이익 될 것이 없습니다.

    혼자 알고 즐기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지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화엄경>에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후

    그 오묘한 진리를 중생들에게 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고민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오묘한 법의 귀중함을 상징하면서

    그 진리는 대중에게 회향될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인 것입니다.


    부처님께 한량없는 자비심이 없었다면 불교도 없습니다

    그 깨달은 바를 혼자 즐기고 말았으면

    지금가지 면면히 전해 올 불교라는 종교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말입니다.

    불자의 행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보배세상을 중생들에게 펼쳐 보이셨듯이

    불자들도 불법에 귀의하여 배운 바른 진리를 이웃에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비이고 자비는 실천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지성이 비판 받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

    지금 자신의 모습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불자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100년 후 1000년 후의 자신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막막할 겁니다.


    어떤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윤회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지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이치 말입니다.

    미래의 자신을 알려고 하지 말고 지금의 자신을 보라는 겁니다.

     

    얼마나 굳은 믿음으로 얼마나 배우고 알아차리고 얼마나 실천하는가를 반조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는 순간 환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실체가 보일 것입니다.”

     

    믿음과 앎과 행함은 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작용도 아니다.

    하나로 동시에 돌아가는 것이다.

     

     

    # []

      

    부처님이 가르치신 진리의 도리를 바르게 알고

    그것을 현실에서 바로 깨닫는 것을 증()이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시간 따로, 배워서 알아차리는 시간 따로, 실천하는 시간 따로,

    그렇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매 순간 동시에

    믿고, 배우고, 실천하고 깨닫는 것이 증()인 것입니다.


     천지(天地)는 동근(同根)이라 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너입니다.

    미물이라고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미물도 치열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높은 산은 높아서 좋고 낮은 산은 낮아서 좋은 겁니다.

    차별(差別)을 넘어서야 진실이 보입니다.

     ‘토끼와 호랑이가 지금의 형상을 넘어서면

     호랑이와 토끼로 변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의 차이를 차별해 버리면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

     윤회하는 중생 모두가 일체평등의 자리에 들 수 없게 됩니다.


     일체중생이 다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부처님의 선언은

     지금 보이는 차이에 끌리지 말고 근원을 보라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의 근원은 바로 부처, 불성입니다.

     그래서 이웃집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이고

     옆 동네 독거 어르신이 나의 아버지인 겁니다.

     부처가 되길 바란다면 먼저

     모든 생명을 부처로 보는 눈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른 깨달음입니다.


     결국

     해탈열반에 이르는 길은

     신해행증의 철저한 삶을 사는 것이요,

     일체에 집착과 갈애가 없는 마음이요,

     일체중생을 부처로 보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자비불교정토회

    정인 합장

    20164월 10

    아미타불천일기도 269

    다음카페   개운선원

    http://cafe.daum.net/buddhason

     

                                                      

     

    - 나무붓다야 나무달마야 나무승가야 -

     


    출처 : 개운선원
    글쓴이 : 正印 (남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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