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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세상을 바로 보는 법(237)
    남광 개운상담 엣세이 2016. 3. 8. 23:06

     


    세상을 바로 보는 법(237)



    어느 날 지하철 역 앞에

    한 맹인이 앉아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 앞에 안내 문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앞 못 보는 맹인입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A)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동전 몇 푼 던져주고

    비정하게 가고 맙니다.


    그런데 어느 여자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 문구를 다음과 같이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에도

    저는 앞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B)

    그러자 이 문구를 본 많은 사람들이

    자비심을 내어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위 사례 (A)의 문구는 맹인 자신의 처지만 알려주고 있어

    보는 사람이 동정심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위 사례 (A)의 문구는 자선을 베푸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도록 하여 많은 동정심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어느 비 오는 날 밤

    술집 앞에 한 할머니가

    꽃을 팔고 있습니다.

    한 신사가 들어가며

    이 꽃 얼마요?”

    “1만입니다.”

    할머니가 밤늦게 이렇게 고생하시나요?”

    , 제 손녀가 병을 앓고 있어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신사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5만원을 주었습니다.

    그가 술 집안으로 들어오자

    종업원이 말합니다.

    손님 그 꽃 앞에 할머니에게서 샀지요?”

    그렇소..”

    그 할머니 손녀 아프다고 하지요?

    그것 거짓말이요, 그 할머니 손녀도 없어요.”

    그러자 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그렇소. 그런 아픈 손녀가 없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이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위 종업원은 할머니의 거짓된 말에 초점을 주고 있으나

    그 신사는 할머니 손녀가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 종업원은 시비의 마음으로 할머니의 행위를 증오합니다.

    그 결과 항상 각박한 마음으로 세상을 사니 힘이 듭니다.

    자신이 어려움에 처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신사는 할머니를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데 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은 마음이 풍요롭고. 자신이 어려움에 처할 때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사람은 습관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합니다.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사고의 틀이라 합니다.

    고정관념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고정관념이 중생으로 세세생생 내려가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생사윤회를 벗어나기 위해 이 고정관념을 파타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 마음 때문에 세상사에 갈등이 생기고 고통이 생깁니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청정하고 대립이 없는 평등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나라고 하는 생각에 집착하여 뒤집어져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뒤집어진 것을 전도망상이라 합니다.


    그 전도된 것을 다시 뒤집어 보는 것이

    거꾸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관점을 바꾸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져

    이 세상을 멋지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법우님들

    오늘은 불교 공부의 관점에 대해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데에도

    (/)와 이()”의 관점이란 것이 있습니다.

     

    ◈◇ ()적인 관점

    ()란 있음 즉 (/)의 관점을 말합니다.

    있다 없다 유무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을 존재론적인 관점이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본래 이 우주는 허공같이 비어 있는데

    인간이 어떤 어리석은 한 생각을 일으켜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윤회의 주체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란 있고 없음을 실체로 보는 것입니다.


    윤회의 주체는 다름 아닌 식() 즉 마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의 관점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법유식(萬法有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법이란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삼라만상의 모든 형상이 오직 마음으로 짓는 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고도 합니다.

    이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 유식학이요,

    그에 관련된 경전이 법화경, 정토삼부경 등으로 보신불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를 지극히 파헤치면

    결국 모두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니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無我)를 체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상은 텅 비어 있는 ()이라고 본 것입니다.


    처음에는 유적(有的)인 관점에서 보았지만 그 실체(실상)가 공()이라 본 것입니다.

    즉 실상은 ()인데 실제 내가 있다(成事)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원각경, 기신론, 능엄경은 윤회의 관점을 유적인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유교(有敎)의 진수인 화엄경은

    일승원교대방광불화엄경으로 결국 양변을 떠난 중도실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 극치는 마음이며, 마음의 실상은 텅 비어있는 공()이라는 것입니다.

    화엄의 궁극은 중도실상을 뜻합니다.


    ()가 즉 심()이요, ()’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을 뜻하며, 그 자리가 바로 중도실상이라는 것입니다.

     

    ◈◇ ()적인 관점

    ()란 공() 즉 무아(無我)의 관점을 말합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진리로 들어가

    우주만법이 공()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본 경전은 바로 반야부 계통의 경전입니다.

    이 세상은 공()하지만 인연 따라 유()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처음에는 공()으로 들어가지만 나중에는 유()를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뜻하며 그 자리가 바로 중도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공의 관점에서 윤회는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 無我(무아)인데,

    이 주인공은 없이 ()만 윤회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파도와 물은 본래 그 속성이 다 물()입니다.

    물이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났다가 바람이 그치면

    파도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파도를 []라하고 물을 []이라 하면

    결국 공즉시색이요, 색즉시공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윤회의 주체는 무아(無我)라 보는 것입니다.

     

    ◈◇ 중도실상

    초기경전인 아함경은 정견(正見)을 가지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정견이 바로 [중도실상]을 뜻합니다.

    즉 아함경에서는 업()은 있어도 작자(無我)는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윤회의 주체를 놓고

    ()의 관점에서 보아도 궁극에는 [무아/無我] 즉 공()이 되고

    ()의 관점에서 보아도 궁극에는 [파도=] 즉 사(/)가 됩니다.

    이것은 바로 결국 중도실상의 자리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변함이 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인데,

    그 본성에 인()과 연()이 닿으면 생겼다가 없어질 뿐입니다.

    그 법만이 오직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에 집착해도 고통이 생겨나고

    (/무아/법집)에 집착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직 본성에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잘 관찰하여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중도실상의 삶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전도 망상된 생각을 바로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고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못 보니 도와 달라맹인의 관점이며,

    이 좋은날 앞을 못 보는 자.”는 자선하는 사람의 관점입니다.


    두 가지 모두의 관점에 모두 걸림이 없이

    그냥 불쌍한 사람 도와 줄 마음을 내는 것이

    중도실상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머무는바 없는 마음을 내라.’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자비불교정토회

    정인(正印)합장

    201638

    아미타불천일기도 237

     

     


                                     자비송 



     




     


     

                                                



    출처 : 개운선원
    글쓴이 : 正印 (남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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