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진묵스님 발자취를 찾아서-완주 청량산 원등사
완주 청량산 원등사로 진묵스님을 뵈오러 갔다. 절 입구에 차를 세우고 진묵스님이 걸어 올라가신 길을 따라 계곡을 옆에 끼고 한 시간 남짓 걸어 올랐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지만 찻길로 걸어 가니 더 힘든 것 같았다. 그러나 진묵스님 발자취를 따라 가는데 힘든 것이 대수랴.
입구에 있는 원등사 표지석.
청량산 자락의 기암괴석.
청량산 계곡. 진묵스님이 더운 날 처음 원등암을 올라 가실 때 이 계곡에서 시원하게 목욕이라도 하였을 법 했다.
바로 아래에는 작은 폭포가 있었다.
폭포 옆에는 거대한 세 쪽의 바위가 있는데, 두 바위는 한 덩어리였다가 둘로 쪼개진 듯이 보였다.
산사 아래의 대나무 밭. 작년인가 재작년 겨울 폭설이 많이 왔을 때 대부분의 대나무들이 죽었다.
파아란 것들은 올 해 새로 난 것들이다. 아래 사진에는 죽은 대나무 가지가 하얗게 보인다.
원등사 전경.
원등사의 내역을 알려 주는 표지석. 진묵스님이 한때 주석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바위 암석 속에 지은 약사전.
명부전.
명부전 뒷 편 바위에 그린 관음보살상.
대웅전
원등사에서 바라 본 전주 방면. 원등사는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저 멀리 변산 월명암에 진묵스님이 26세에 득도하고 계실 때, 이곳 나한전에서 불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진묵스님이 보고 원등암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신기한 일이다.
진묵스님이 원등암에 계실 때에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목부암(木鳧庵) 등불, 십육 나한
전북 완주군 소양면 청량산(淸凉山)에는 대원사와 목부암이 있는데, 목부암은 산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목부암은 신라 말 보조체징(普照體澄)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보조선사가 이곳 산세가 좋아 보여 나무로 오리를 깎아 공중에 날리면서 나무오리가 내려앉은 곳에 절을 짓겠다고 하였는데, 그 나무오리가 내려앉은 곳에 절을 세우고 목부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진묵은 더운 여름날 땀을 흘리며 목부암에 당도했다. 주지스님은 출타 중이고 절에는 열 네 살 된 행자와 공양주 보살 그리고 불공을 드리러 온 한 청신녀만 있을 뿐이었다. 청신녀는 40이 다 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여 갖은 방법을 다하다가 이 절 나한이 영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날이 길일이라고 하여 처음 찾아 온 것이었다. 목부암은 예로부터 나한도량으로서 그 영험함이 이미 소문이 나 있었던 터다. 그런데 주지스님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고 애를 태우다가 할 수 없이 객승인 진묵에게 기도를 부탁하게 되었다.
“원하시면 해드리지요. 그 대신 조건이 있소. 목이 컬컬하니 곡차를 준비하시오.”
“곡차라니요?”
“곡차를 모르시오? 곡식으로 빚은 차 말입니다.”
“술 말씀이오니까?”
“어허, 술이 아니라 곡차라니까요.”
“알겠습니다.”
“곡차만 준비해 오면 맡아주지요. 그런데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요?”
“아들을 얻고자 합니다.”
“그거야 문제가 없지요. 어서 가서 곡차나 준비해 오시오.”
저녁을 끝내고 진묵은 나한전에 예불하러 갔다. 법당 중앙의 석가모니불에게 삼배를 드리고 나서 십육 나한들을 차례로 훑어본다.
“음-매우 영특하게 생겼군. 됐다 됐어. 이만하면 손색이 없는 나한이다.”
청신녀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거니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스님이 술[곡차]을 준비하라고 하니 당치도 않을 일이 아닌가? 그래도 굳이 술을 곡차라고 우기고 달라고 하니 어쩔 도리 없이 행자를 데리고 마을로 곡차를 구하러 내려갔다.
진묵은 홀로 어두운 마당을 거닐면서 문득 나한전 앞의 인등(引燈)에 눈길이 갔다. ‘어떻게 저렇게 희미한 불빛이 그 먼 월명암에까지 불빛이 갈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다가 십육 나한의 신통력을 통찰하게 되었다. 바로 십육 나한의 신통력으로 월명암의 진묵에게 불빛을 보낸 것이었다.
‘주지승이 너무 고지식하여 나한들이 배가 곯았구나. 그래서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구나. 역시 나한들의 신통력은 대단해.’
진묵은 밤새 곡차를 다 들이키고 깊은 잠에 들었다. 첫 새벽에 행자가 도량석하는 목탁소리에 잠이 깼다. 행자는 도량석을 끝내고 법당에 올라가 작은 범종을 울리며 예불소리를 했다.
“허, 그놈 성대 한 번 좋다. 멋들어지게 넘어 가는구나.”
진묵은 예불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서 행자를 불렀다.
“너 올해 몇 살이지?”
“열 네 살이옵니다.”
“네 염불소리를 들으니 환희심이 저절로 나는구나. 잘만 하면 중노릇 잘 하겠다.”
“중노릇 잘 하고 싶지만 스승님이 없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참 중노릇인지 모릅니다.”
“하긴 그렇겠지. 이제부터는 내가 중노릇 가르쳐 줄 터이니 잘 해보아라.”
“스님, 그러면 오늘부터 스님께서 제 스승님이 되어 주십시오.”
“너의 스승이야 이 절 주지스님이 되셔야지. 나는 중노릇만 가르쳐 주마.”
“주지스님은 저의 백부이신데, 이제는 늙으셔서 눈도 잘 보이지 않아 책의 진 글씨는 못 보십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고명하신 스승님을 물색하여 보내주신다고 하셨는데, 제가 떠나면 백부님을 모실 사람이 없어서 일부러 제가 안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기특하구나. 스승은 어찌되었건 우선 공부하는 것이 상책이니 열심히 배우도록 하여라.”
“예, 감사하옵니다.”
이로부터 삼일 후 청신녀의 삼일기도가 끝나는 날 아침에 행자는 백부인 주지스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미계를 받고 진묵의 첫 상좌가 되었다. 법명은 청안(淸安)이라고 했다. 기도 회향 날 청신녀는 진묵스님에게 말했다.
“스님께서 곡차를 마련해 오면 아들을 점지해 주시겠다고 하고서 기도에 한 번도 참예를 안 해주셨으니 오늘 회향마지는 스님께서 친히 올려주시지요.”
사실 진묵은 연 사흘 동안 곡차로 더불어 지내면서 한 차례도 기도에 참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청신녀는 공양주 보살과 함께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하여 나한전에 올리고 진묵을 청했다. 진묵은 남은 곡차를 마저 마시고 포단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었다.
“공양을 다 올렸거든 어서 가서 부지런히 절을 하시오. 천배일고(千拜一顧)라 했으니, 천 배를 드려야 한번 돌아보실 것이니 절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나도 곧 가리다.”
이윽고 나한전에 나타난 진묵은 석가모니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서 십육나한을 차례로 둘러 본 다음 나한에게 다가가서 느닷없이 귀를 잡아 틀고, 또 다른 나한한테는 뺨을 때리는 것이었다.
“야, 인석아! 이 청신녀에게 아들 하나를 점지해주란 말이다.”
이와 같이 열여섯 나한들의 뺨을 차례로 때리고 귀를 잡아당기면서 ‘속히 아들을 점지해 주라.’고 호령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기이한 행동인가? 공경과 정성을 다해도 소원을 들어 줄까 말까 일 터인데, 진묵은 나한들을 마치 어린 하인 다루듯이 귀를 잡아당기고 뺨까지 때리면서 호통을 치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이만하면 나한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게요. 그러니 이번에는 틀림없이 생남하도록 영험을 내릴 것이니, 아들을 얻거들랑 답례나 톡톡히 하시오.”
“예? 아- 예. 그런데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 하는지요?”
“그야 물론 곡차 한 말이지요. 허허.”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청신녀에게 태기가 있었고 열 달 뒤에 옥동자를 낳으니, 그 집안은 물론이고 온 마을에 경사가 났다. 이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서 진묵의 신통함과 또 곡차이야기가 꼭 따라붙어 다녔다.
한번 소문이 나자 목부암의 나한전은 자주 생남불공을 받게 되어 향화가 끊이질 않아서 좋긴 하였으나, 그 대신 나한들은 진묵에게 호되게 뺨을 얻어맞으니 나한들로서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전주 관아를 피해 숨어 다니는 한 아전이 있었는데, 진묵과는 평소 아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 아전은 전주 관아의 물품을 사사로이 수백 량을 축내고 처벌이 두려워 도망하기로 마음먹고 진묵을 찾아왔다.
“관물을 축내고 도망 다니는 것이 어찌 남아의 도리겠는가? 다만 집에 가서 두어 말의 쌀을 준비해 와서 이곳 나한에게 공양하면 장차 좋은 길이 있을 것이다.”
아전은 진묵이 시키는 대로 행하였다.
“관아에 혹 빈자리가 있느냐?”
“예, 감옥의 형리 자리가 지금 비어 있습니다만, 녹봉이 매우 박하고 무료한 자리입니다.”
“무료하다말고 급히 가서 자청하여 그 일을 맡되, 30일을 넘기지는 마라.”
아전이 돌아가자 진묵은 주장자를 들고 나한전으로 들어가 차례로 나한의 머리를 세 번 씩 두드리고 그 아전의 일을 잘 돌보아주라고 했다. 이튿날 나한들이 아전의 꿈에 나타나 꾸짖었다.
“네가 구할 것이 있으면 바로 우리에게 와서 고할 것이지, 어찌 진묵스님에게 무고하여 우리를 괴롭히느냐? 너로 봐서는 돌보지 않는 것이 옳겠지만, 대사의 명이라 쫓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 네 일을 봐주는 것이니, 이 뒤로는 이 같은 일이 없도록 하라.”
아전은 도움이 있을 줄 알고 자청하여 옥리가 되었는데, 우연히 송사가 빈번하게 일어나 죄수들이 옥에 가득하여 그 30일 동안 축낸 재물을 다 보충하고 그 직을 다른 아전에게 넘겨주었다. 얼마 후 새 옥리는 뇌물을 징수한 죄로 구금되었다.
진묵이 목부암에 주석한지 삼년이 되던 어느 날 생남불공을 드리러 찾아온 한 청신녀는 밤에 꿈을 꾸었는데, 가사를 단정히 입은 열여섯 스님들이 청신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이 절에 머물고 있는 십육나한인데, 여러분이 불공을 드리러 오는 덕에 우리가 굶지 않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진묵스님에게 뺨을 얻어맞아야 하니 큰 고역입니다. 그러니 불공을 드리려거든 가만히 법당에 와서 우리에게 헌공예배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주리다.”
청신녀는 꿈이 하도 이상하여 진묵에게 간밤의 꿈 이야기를 했다.
“허허, 내가 나한들한테 지나쳤나 보군. 이제는 순순히 부탁해야겠군.”
진묵은 나한이 현몽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 절을 떠날 때가 왔음을 알았다. 상좌 청안을 불러 떠날 채비를 하라고 일렀다. 주지스님과 대중들이 간곡히 만류하였지만, 떠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야 하는 것이 스님들의 행각이라 아무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진묵은 떠나면서 주지스님에게 나한전에 정성껏 예배 공양할 것을 당부했다. 주지스님은 이 후로 절 이름을 원등암(遠燈庵)으로 고쳐 부르겠다고 했다. 진묵이 멀리서 등불을 보고 찾아오게 된 기연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진묵은 인사를 마치고 청안을 앞세우고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