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無緣)자비의 눈물을~
<< 무연(無緣)의 눈물 >>
◇ 회원여러분~
날씨가 많이 차가와 졌습니다.
일교차가 심하니 더욱 감기 조심하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부처님 전 기원 드립니다.
오늘은 눈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눈물 중에서도 무연(無緣)의 눈물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옛날 경허선사는 지나가는 나병환자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환자는 이십대가 갓 넘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경허는 한방에서 살을 맞대고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 때 제자인 만공 선사는 경허의 걸림 없는 자비(慈悲)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절 밖으로 추방해 달라고 애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경허의 눈에 한 여인의 불행이 일체 여자의 불행으로 보인 것입니다.
● 동체대비(同体大悲) !
그것은 낮고 높은 것을 가리지 않고 귀천을 분별치 않은 자비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고통 받는 사람의 몸과 마음같이 되어 진실로 생을 아파 할 때
동체대비는 성취되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경허선사처럼 대비(大悲)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볼 때 고통
받는 일체의 중생들에게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통 속에 헤매는 중생들은 그들의 업보인 몸뚱이를 떠나버리면 누구나
같은 우주의 생명체가 되며, 그 우주 생명체가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다른 말로 여래(如來)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석가세존께서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모두 한 우주의 생명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은 동체(同體)요,
여래(如來)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마음은 깨달은 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은이의 눈물은 깨닫지 못한 이들의 눈물과 차이가
나게 됩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은 인연(因緣) 있는 이만을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깨달은이는 대비(大悲)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무연(無緣)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일체의 중생이 바로로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요.
◇ 지금 우리나라는 종교천국이라고 합니다.
시내 곳곳을 둘러보면~
옛날에는 동내마다 성황당이란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동내 곳곳에 십자가가 세워져있습니다.
또 산골짜기 곳곳에는 절들이 있습니다.
◇ 그런데, 진실한 종교인이라면
교회에서 하느님을 찾고
절에 가서 부처님을 찾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 세상 곳곳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고
부처님도 처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내 가족이 부처요, 이웃이 부처가 됩니다.
비록 번뇌에 가득하여 깨닫지 못했을 뿐
여래(如來)임에 틀림없습니다.
◇ 회원 여러분~
주위에 고통 받고 헐벗고 있는 민중이
다름 아닌 여래(如來)인데
그 여래(如來)가 고통을 받도록 방치해 버린다면
어느 보살이 제도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 여래(如來)에 봉사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해탈입니다.
최근 우리카페 회원님 중
이 사회적 해탈에 눈을 뜨시고
스스로 봉사활동을 하시는 분이
많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저는 봉사활동을 하시는 여래(如來)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아울러
무연(無緣)자비의 눈물을
더욱 더 많이 흘릴 것을 부탁드립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남광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