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도움되지 않는 논쟁을 초월하라~~
7.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논쟁을 초월하라.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위성에 있는 기원정사에 머물러 계시었다. 그 때 존자 마라가자는 홀로 조용한 곳에 가서 앉아 있었는데 그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러한 그릇된 견해는 세존께서 설하지 않았고, 버려지고 거부되어 왔다. 즉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라든가, “세계는 영원하지 못한 것이다.”라든가, “세계는 유한한 것이다.”라든가, “세계는 유한하지 않은 것이다.”라든가, “생명과 신체는 동일하다.”라든가, “생명과 신체는 다른 것이다.”라든가, “유정(有情) 등 생명을 가진 것은 사후에도 존재한다.”라든가, “유정 등 생명은 존재하지 아니한다.”라든가, “유정 등 생명을 가진 것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든가 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견해를 세존께서는 내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 세존께서 내게 말씀해 주지 않는 것은 내게 좋은 일도 아니고 내가 더 참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나는 세존에게 가서 그 이유를 물어 보아야겠다.
만약 세존께서 내게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 또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라든가 <사람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신다면 나는 세존 밑에서 청정한 수행할 것이다. 만약 세존께서 그것을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나는 수학(修學)을 버리고 세속의 생활로 돌아가야겠다.
존자 마라가자는 저녁나절 고요히 생각에 잠겼던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이 계신 곳으로 갔다. 그는 세존께 인사드리고 한곳에 앉아 세존께 다음과 같이 말아였다.
“세존이시여, 제가 홀로 조용한 곳으로 가서 앉아 있을 때, 제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그릇된 견해는 세존께서 말씀하시지 않았고, 버려지고 거부되어 왔습니다. 즉 ”세계는 영원한 것이라든가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든가, 내지 사람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든가 하는 이러한 견해들은
세존께서는 내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 내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내게 좋은 일이 아니요 나는 더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세계는 영원한 것이라든가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든가, 내지 사람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내게 말씀하신다면 나는 세존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계속하겠지만, 만약 그러한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수학을 버리고 세속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
◇ 만약 세존께서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라고 알고 계신다면 세존께서는 내게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세존께서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알고 계신다면 내게 “세계는 영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만일 세존께서 세계는 영원한 것이라고도, 세계는 영원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알지 못하신다면, 지금알지 못하시고 지금보지 못하시는 사람으로서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보고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정직하고 바른 일입니다. “그리고 세계는 유한한가, 아닌가. 또 생명과 신체는 동일한가, 아닌가. 또 사람은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아닌가. 또 사람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확실히 말씀해주십시오. 만일 그것을 알고 계시지 않는다면, 지금 나는 알고 있지 않고, 지금보고 있지 않는 사람(세존)으로서 ”나는 모른다. 나는 보고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정직하고 바른 일입니다.
◇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마라가자야, 내가 일찍이 너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더냐. “오너라. 마라가자야, 내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여라.”라든가, 나는 너에게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내지 사람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
<세존이시여, 그러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내게 이와 같이 말한 일이 있었더냐. “세존이시여, 세존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겠습니다. 세존께서 저에게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내지 사람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요”라고...>
<세존이시여,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마라가자야, 그런데 내가 너에게 “ 마라가자야, 오너라. 너는 내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해야한다. 나는 너에게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내지 사람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해 주겠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아, 너는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라고 말하지 않는 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데 대체 그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 마라가자야, 만약 어떤 사람이 “ 세계는 영원한 것이라든가 영원하지 못한 것이라든가, 내지 사람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든가, 세존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지 않는 한, 나는 세존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면, 마가자라야, 여래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때 그 사람은 죽어버릴 것임에 틀림없다.
◇ << 독화살의 비유 >>
마라가자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독이 묻은 화살에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나 친족들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만약 “나를 쏜 사람이 황족인지 바라문인지 농. 상. 공업자인지 노예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나는 이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고 말했다고 하자. 또 그가 만약 “나를 쏜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이름의 사람이며 이러이러한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나는 이 화살을 뽑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하자, 또 그가 만약 “나를 쏜 그 사람의 귀가 큰가 작은가 중간쯤인가를 알기 전에는 나는 이 화살을 뽑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하자. 또 그가 만약 “나를 쏜 그 사람의 피부가 검은가 갈색인가 금색인가를 알기 전에는 나는 이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하자. 또 그가 만약 “나를 쏜 그 활이 보통 활인지 아니면 석궁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이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자. 또 “나를 쏜 화살촉의 종류가 무엇인지, 바른 독의 종류가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 이 화살을 뽑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면~
마라가자야, 그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그 사람은 죽어버릴 것임에 틀림없다.
마라가자야, 마치 그와 마찬가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세계는 영원한 것인가,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든가, 내지 사람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든가, 세존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한 나는 세존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면,~
마라가자야, 여래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때 그 사람은 죽어버릴 것임에 틀림이 없다.
◇ 마라가자야, “세계는 영원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한 수행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라가자야, “세계는 영원하지 못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한 수행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라가자야, “세계는 영원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든지 혹은 세계는 영원하지 못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든지 그와는 상관없이 지금 바로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고, 수(愁=시름), 비(悲=슬픔),고(苦=고통),우(憂=근심),뇌(惱=괴로움)가 있는 것이다.
나는 현실의 세계에서 그것들을 제압(制壓)하는 길을 알게 한다.
마라가자야, “세계는 유한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한 수행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라가자야, “세계는 영원하지 못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한 수행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라가자야, “세계는 유한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건 혹은 세계는 영원하지 못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건 그와는 상관없이 지금 바로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고, 수(愁=시름), 비(悲=슬픔),고(苦=고통),우(憂=근심),뇌(惱=괴로움)가 있는 것이다.
나는 현실의 세계에서 그것들을 제압(制壓)하는 길을 알게 한다.
마라가자야, “생명과 육체는 동일한 견해가 있을 때 청정한 수행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라가자야, “생명과 육체는 다른 것이라는 견해가 있을 때 청정한 수행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라가자야, “생명과 육체가 동일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든지 혹은 생명과 육체가 다른 것이라는 견해가 있든지 그와는 상관없이 지금 바로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고, 수(愁=시름), 비(悲=슬픔),고(苦=고통),우(憂=근심),뇌(惱=괴로움)가 있는 것이다.
나는 현실의 세계에서 그것들을 제압(制壓)하는 길을 알게 한다.
마라가자야, “이와 같이 사람은 사후에 존재한다는 견해가 있건 아니건 또 사람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견해가 있건 그와 상관없이 지금 바로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고, 수(愁=시름), 비(悲=슬픔),고(苦=고통),우(憂=근심),뇌(惱=괴로움)가 있는 것이다.
나는 현실의 세계에서 그것들을 제압(制壓)하는 길을 알게 한다.
◇ 마라가자야, 그러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으로 수지(受持=받아지님)하여라. 또 내가 말한 것을 말한 것으로 너는 수지 하여라.
마라가자야, 그러면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마라가자야,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고, “세계는 영원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고, “세계는 유한한 것이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고 , “세계는 유한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고, “생명과 신체는 동일하다.”라고 말하지 않았고, “생명과 신체는 다른 것이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고, “유정(有情) 등 생명을 가진 것은 사후에도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았고, “유정 등 생명은 존재하지 아니한다.”라고 말하지 않았고, “유정 등 생명을 가진 것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 마라가자야, 왜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하면, 마라가자야, 그것은 이익이 따르는 것이 아니고, 청정한 수행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는 것. 욕망에서 떠나버린 것. 번뇌를 지멸(止滅=그치게 하고 멸하는 것)하는 것. 마음의 적정(寂靜=고요하고 맑음), 훌륭한 지혜.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위하여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 마라가자야, “이것이 고(苦)다.”고 나는 말하였고, “이것이 고(苦)가 생기(生起)하는 원인이다.”라고 말하였고, “이것이 고(苦)의 지멸(止滅)이다.”고 나는 말하였고 “이것은 고의 지멸(止滅)에 이르는 길이다.”고 나는 말하였다. 왜 그것을 내가 말하였겠는가.
마라거자야, 그것은 참으로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고, 청정한 수행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세속적인 것을 멀리 하는 것. 욕망에서 떠나는 것. 번뇌를 지멸하는 것. 마음의 적정. 훌륭한 지혜. 바른 깨달음. 열반을 위하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말한 것이다.
◇ “ 마라가자야, 그러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은 그대로 너는 수지하여라. 또 내가 말한 것으로 너는 수지 하여라. ”
세존께서는 이상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존자 마라가자는 환희하며 세존의 말씀을 신수(信受=믿고 받아들임)
진리(法)를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외도(外道)에 이끌리는 일이 없다.
그들은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알아서
평탄하지 않은 길을 평탄하게 걸어간다.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은
외도에 이끌리는 일이 없다.
그들은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알아서
평탄하지 않는 길을 평탄하게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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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광해설> 유사 이래 지구상 인류들의 사고구조(생각의 틀=고정관념)는 크게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 <존재론>적 사고구조(생각의 틀= 고정관념)
<존재론>적 사고구조(생각의 틀= 고정관념)는 보통 사람들의 대부분의 사고 구조입니다. 즉 이 세상이 유한 한가, 영원한가, 아닌가, 사람이 죽고 나면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돈이 있는가, 없는가.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있는가(존재=유), 없는가(비존재=무)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이념도 이 존재론적 사고가 중심이 되어 있고, 기독교도 신의 존재 여부를 두고 유신론을 택했고, 세상을 영원하다고 보는 존재론에 바탕을 둔 종교이다.
◇ <인식론>적 사고구조(생각의 틀= 고정관념)
인식론은 사람이 실제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고 생각하느냐에 초점을 둔 사고의 패턴입니다. 즉 병이 발병할 때 사람이 고통을 느껴야 병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암환자가 암이 발병하였을 때 그 것을 인식하는 순간 암은 갑자기 크게 번지게 됩니다.
또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가난해도 행복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생에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 무상한 존재들은 고통을 느낀다고 봅니다. 또 욕망은 무한한데 현실이 다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니 그에 따른 상대적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인식론은 주관적인 것이며, 개개인이 느끼고 경험하는 바가 다 다릅니다.
또 이 고통의 중심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사고에 있는 것입니다. 즉 이기적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사고의 틀은 세세생생 유전되어온 것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업장이라 합니다.
◇ 위에서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영원한가라는 존재론적 생각은 아무리해도 그 순간에도 지구는 돌고 세상은 돌아가고 생명은 윤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인식론적으로는 이 고통을 해결하는 벙법이 바로 무한한 욕망과 이기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의 길 해탈의 길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길을 제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론적인
생각을 아무리해도 그것은 탁상공론과 같아 실제로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인식론적 인 문제 즉 마음의 문제임을 알고
마음을 닦아 고통에서 벗어나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시고 우리들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음을 다스리는 길과 법이 핵심이 됩니다. 팔만대장경도
모두 부처님께서 우리 마음속 팔만사천 번뇌를 다 벗어나 영원한 행복, 해탈(열반 = 윤회를 벗어남)의 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