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본 불교적 허무주의 바로 알자
니체가 본 불교적 허무주의 바로 알자
[1] 니체가 본 불교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에게서 큰 영감을 받은 니체(19세기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는 처음에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에 반해서 자신의 유일한 스승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후일 니체는 쇼펜하우어에 삶이 너무 염세주의인 점을 비판하였다. 또 그는 불교에 관한한 한평생 쇼펜하우어의 해석을 벗어나지 못했다.
니체는 처음에는 불교에 열광적이었으나, 후에는 불교를 염세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간주하고, 쇼펜하우어를 저버림과 동시에 불교도 지탄의 대상으로 여겼다.
◇ 니체는 불교의 자비관이나 기독교의 신도 다 부정했다.
다음은 불교와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비교한 내용이다.
불교는 기독교보다 백배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격세유전을 통해 객관적이고 냉정한 방식으로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을 부여 받았으며,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철학적 움직임이 있고 난 후에 등장했으므로, 불교가 등장했을 때는 이미 신(神)이란 개념은 소멸된 후였다.
불교는 역사상 유일한 실증주의적인 종교이다. 인식론에 있어서조차 (불교의 인식론은 현상적 입장을 취한다.) 불교는 <원죄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입장에서 고통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 점이 기독교와 크게 구분되는 점이다.
그는 “불교는 약속을 하는 대신 실천을 하는데, 기독교는 모든 것을 약속은 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고 주장 했다.
● 니체는 “기독교는 이제 기진맥진한 상태이다. 더 이상 탐구하거나 투쟁할 기력도 없으며, 독자적으로 서려는 의지도, 부활을 믿기 위해 필요한 힘도, 궤변을 경멸할 힘도, 인간의 무능함과 <죄지은 자>로서의 불안감을 극복할 힘도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저 애매한 기독교도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나 병든 영혼을 보듬어야 하는 기독교라면 <십자가에 못박힌 신>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내세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한 가운데 유럽에서 불교가 점차 확산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니체는 불교를 허무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본래 허무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 초 유럽에서 형성이 된 철학이론으로, 절대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상을 말한다. 이 사상은 곧 바로 윤리에서 원래보다 훨씬 단호한 의미까지 내포하게 되었다. 즉 모든 진리나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정치에도 개인에게 행사되는 어떠한 사회적 구속도 거부하는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허무주의는 러시아 혁명주의자들이 주장하여 실제로 계급투쟁에 이용했다.
● 니체나 특히 기독교 사상가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를 허무주의적인 교리라고 한 것이다.
[2] 불교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불교는 이세상이 무상(無常)하고 이기적인 자아의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는 인간들의 고통이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번뇌라고 규정하고, 서로서로 잘살아가는
이타적인 삶을 가르치고 있다.
불교는 사회적 질서유지를 존중하고, 엄격한 윤리관과 체계 잡힌 가치관을 제시하며, 타인에 대해 책임 있는 행동을 가르치며, 불교가 전파된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질서를 지킬 것을 엄중히 설법하였다. 따라서 위 일부 서양 철학자나 기독교사상가들이 <불교가 허무주의>라고 하는 주장은 불교 본래의 모습을 심각하게 왜곡 해석한 결과이다.
◇ 지금도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 특히 서양사(철학)를 전공한 교수나 학생들이 위 니체나 기독교사상가들의 설만을 믿고 불교를 전혀 왜곡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심지어 불교를 전공하거나 배우는 사람들 중에도 서양인들이 불교를 공격하기 위해 연구해놓은 이론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예를 들면 반야경에 나오는 공(空)의 개념을 잘 못 해석하여 무(無)로 해석하여,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극락이 어디 있는가? 부처나 진리라는 것도 모두 알고 보면 무(無)라는 것이다. 사성제도 무요, 인연도 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엉터리 주장을 하는 학자가 서양
철학을 전공하는 기독교사상가를 중심으로 있고, 그들에게서 공부(특히 유학파)한 불교 전공자들이 가끔 본다. 이것은 불교를 허무주의로 보는 대표적인 예이다.
[3] 존재론적사고와 인식론적사고
● 역사 이래 인류가 이 우주와 세상을 생각하는 방식이 2가지가 있다. 그 방식에는 존재론적인 사고와 인식론적인 사고가 있다.
존재론적인 사고란 이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 하는가 아닌가?>라는 양극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神)이 있는가 없는가?> <세상은 유한한가 아닌가?> <진리란 존재하는가 아닌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 존재론은 서양철학의 주류요, 서양 기독교철학의 주류이며, 현재 우리들도 보통 이러한 사고에 이미 길들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는 존재론적인 생각으로 이미 지배하고 당하고 있다.
보통 우리는 있느냐 없느냐하는 소위<존재와 비존재>라는 사고로 되어있다.
이것은 영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존재는 1) 감각적 쾌락 2) 육신 3) 영혼의 3가지 형태로 나눈다.
이때 육체는 사멸하나 영혼은 불멸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유(有)에 빠진 것으로
이를 불교에서는 상견(常見)이라 한다. 기독교의 영혼에 대한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사람이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없고 영혼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비유(非有,無有)에 빠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단견(斷見)이라 한다.
● 인식론적 사고란 이 세상 모든 것은 지각, 기억, 내성 및 이와 같은 이해를 나타내는 명제, 판단을 포함하여 의욕, 정서와 함께 의식이 기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이라는 존재가 있어도 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신이 인식을 할 때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불교에서는 이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식)으로 짓고 없애고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 불교에서는 위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모두 그릇된 견해라고 본다. 특히 불교에서 무아를 잘못 이해하여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없다.”라는 주장을 하여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오온(五蘊)이나 무아(無我) 또는 십이연기에 대한 것을 이러한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금하셨다.
[4] 독화살의 비유
기원정사에 마룬쿠아라는 젊은 비구가 있었다. 그는 철학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 출가전부터 바라문을 찾아다니며 자기가 의문으로 생각하는 존재론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고 다녔지만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다.
< 세계는 영원한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소멸할 것인가? >라는 문제였다.
그가 출가한 근본 동기도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석존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석존은 그런 문제에 대해 설법하는 일이 없었다.
“이를 바에 내가 여기서 더 수행할 필요가 없다.”이렇게 생각하고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갔다.
“세존이시여, 몇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말을 해 보아라. 마룬쿠야”
“세계는 유한한 것입니까? 무한한 것입니까? 그리고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또 인간이 죽은 다음에는 그 존재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런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더 이상 교단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당돌한 질문에 세존은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 마룬쿠아야~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아라. 어떤 사람이 등에 독화살을 맞았을 때 친지들이 빨리 의사를 불러들여 화살을 뽑고 치료를 서둘렀다. 그 때 당사자인 화살을 맞은 본인이 머리를 저어면서 <저는 화살을 쏜 자가 누구이며, 활과 화살의 종류가 무엇이며, 또 화살을 왜 쏘았는지 이유를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하자. 이 때 만일 그의 말대로 사람들이 의사를 부르지 않고 그의 말대로 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 논의하는 도중에 화살을 맞은 사람은 온몸에 독이 퍼져 죽어버릴 것입니다.”
“ 그렇다. 그 사람은 네 말대로 죽게 된다. 그러니까 누가 활을 쏘았느냐하는 논의는 젖혀두고 화살부터 먼저 뽑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괴로움이라는 독화살을 맞고 있다.
그리고 네가 말하는 문제들은 그것을 아무리 훌륭하게 설명해도 독화살의 제거와는 무관한 것이다. 독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누가 활을 쏘았으며, 또 활과 살촉의 종류는 무엇인가를 알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말하는 문제는 소용없는 그러한 일을 알아보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는 그런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나에게 만일 그런 문제의 해답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미구에 온몸에 독이 퍼져 죽고 말 것이다.”
마룬쿠야는 이 말씀을 듣고 자기 생각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마룬쿠야가 말하는 것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이아 존재론은 불교에서는 무기(無記)
또는 희론(戱論)이라고 해서 배격한다. 그리고 마룬쿠야에 대한 석존의 가르침을 후세의 사람들은 “독화살의 비유”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