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당 남광 2008. 3. 5. 22:09
 

< 오쇼 라즈니쉬의 궤변 > 2004년 12월 1일


  몇 년전 라즈니쉬가 법구경을 강의를 한 <태일출판사 법구경1,2권>을 읽은 적이 있다.

다음 글은 그 때 필자가 일기에 쓴 내용이다. 

  

[1] 오쇼 라즈니쉬의 “법구경”강의


   요즈음 오쇼 라즈니쉬의 “법구경”강의란 번역본 책을 읽고 있다. 그는 20세기에 뛰어난 영적 지도자라고 자처하고 또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도 꽤 많다. 그의 주장이나 이론을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 많다. 그러나 그 반면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려는 궤변도 또한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요즈음 <명상이나 위빠싸나>다 하는 붐이 있어 일반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도 라즈뉘쉬의 법구경 강의에 흠뻑 매료되어 있어, 불교의 진리를 왜곡하여 배우고 있는데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가끔 지하철이나 도서관 등에서 라즈니쉬 법구경을 읽는 젊은이 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었다.)


  라즈니쉬는 몇 가지 점에서는 불교의 원리를 도용하고 있다. 그 예로 <이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으로 짓는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옳다고 하고, 그리고 <의식은 항상 깨어져 있어 관찰자 입장에서 주시하여야 한다.>는 가르침도 따르고 있다.

 

 

 

[2] 오쇼의 치명적인 오류


  오쇼의 치명적인 오류는 이 세상의 이치를 이분법적인 분별심으로 보고 있다.  즉 동양은 내면적 정신세계를 그리고 서양은 외면적 물질세계를 위주로 하는 일차적인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단정하였고, 석가나 예수 등 종교지도자들은 오직 죽음의 문제에만 또는 사후의 문제에만 관심을 둔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또 그는 석가는 해박한 지식도 없이 오직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석가가 6년 동안 고행할 때는 욕망을 억제하였던 것은 스스로 그 욕망을 억제하는데 집착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석가가

드디어 그 집착을 풀고 대 해탈을 얻었다고 그는 단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석가나 예수가 오직 죽음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데 반하여, 그는 자신은 삶의 의미를 훨씬 중요하게 여기며, 진리를 통하기 위해서는 오직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신과 일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그는 정신과 물질을 모두 아우르는 포용력 있는 영적자도자인데 반하여, 석가는 너무 내면적인 정신적인 문제에 집착하고, 예수는 또 너무 물질적 외부적 문제에 집착하고

이 둘 다 죽음의 문제에 매달려 있다고 혹평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석가가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집착하는 마음이며, 그 마음을 놓을 때 대 해탈인 지극한 쾌락과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욕망을 억제하지 말고 맘껏 발산하라. 지금이 즐거우면 미래도 즐겁다.”라고 주장하며 나체주의 프리색스 주의도 성스러운 것임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3] 불교에 관하여 라즈니쉬 너무 무지하다.


  라즈니쉬는 그 스스로 불교나 기독교의 초보 단계도 알지 못하고 그 엄청난 망발을 하고 있으며, 법구경이란 불교의 보석 같은 경전을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인용 강의 하고 그 내용은 부처님 경전이 아니고 자기소리 (쾌락주의, 나체주의, 프리색스)를 늘어

놓고 있다. 그런데, 불교 공부를 하지 않고 명상만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나즈니쉬의 엉터리 법구경 강의에 현혹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 부처님은 인도 카빌라성의 왕자로 태어나시고 자라면서 그 당시 인도 사회에 있던 고급 학문을 다 배우셨다. 심지어 무예도 배우고 심신수련 방법인 요가까지 배우셨다.  그 후 부처님은 인생의 무상을 느끼시고 그 당시 최고의 학자나 정신적 스승을 찾아다니며, 구도의 길을 걸으셨다. 그들에게 조차도 마지막 생사윤회를 끊을 수 없음을 아시고 스스로 큰 깨달음에 드셨다.  그런데도 라즈니쉬는 부처님을 해박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 단정하셨으니, 라즈니쉬가 불교의 관한한 참 무식한자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 불교에서 참선(명상)을 통해 처음 깨닫는 것이 초 견성인데, 이것은 자신의 마음자리를 잠깐 보고 온 것을 말한다. 마치 먹구름 속에 잠시 햇빛이 비취다가 다시 먹구름이 뒤 덥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불교의 무수한 조사나 선지식이 큰 깨우침을 얻은 뒤에도 평생을 보림수행을 하였다. 그래야 생사윤회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을 하시던 것을 멈추신 것도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신 것은 틀림없으나, 그때는 아직 생사윤회에서 해탈하지 못하셨다.

  그래서 니련선하에서 수자타가 준 우유죽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신 후에 큰 깨달음(생사윤회에서 해탈)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라즈니쉬는 그것은 언급하지도 않고, 고행을 푸신 것을 큰 깨달음으로 간주하고, 욕망을 참는 것은 고행이며 그것은 집착이며 그 집착을 놓아야

한다고 엉뚱한 주장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견성이 다가 아니다. 견성한 시점부터 다시 더욱 공부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세 생생이어온 다생의 업장에 의해 습이라는 욕망의 노예에 놓여 있는 육체와 마음을 계속 다스려 나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라즈니쉬는 명상을 통해 본성만 한번 보면 모든 도가 끝나는 것으로 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다름이다. 부처님께서도 바로 이 단계를 특히 경계하라 하시면서 “스스로 부처되었다. 깨달았다고 소리치며, 그 동안의 많은 성현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은 마구니 굴에 든 것”이라고 이미 2천 6백여 년 전에 말씀하셨다.


  ◇ 또 불교에는 정신과 물질이 둘이 아님을 반야경 등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리고 부처님은 전도 선언에서 불교의 목적이 “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라고 강조하셨으며, 불교가 발생한 당시 인도의 상인 계급들이 가장 크게 불교를

옹호하였던 사실을 상기해보면 불교는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건전한 자본과 물질적인

부도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라즈니쉬는 불교 역사 공부도 기독교 역사공부도 하지 않은 무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 불교는 이 세상만사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모든 것이 변화하며 무상하다고 한다. 그리고 근본적인 원인은 무명(어리석음)때문이며, 무명은 끝없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생사윤회를 벗어나려면 이기적인 욕망의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안 된다.    그런데 라즈니쉬는 스스로 명예욕에 불타서 스스로 인류의 대 스승 노릇을 자처하고, 심지어 “ 욕망을 억제하기보다 욕망을 맘껏 발휘하여야하며, 욕망 중에서도 성욕은 그 뿌리가 가장 깊어 성욕을 즐기면 원 없이 즐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욕망의 억압으로부터 튀어나온 돌발사고가 있더라도 절대 후회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것을  볼 때 라즈니쉬는 인생을 상견(常見= 이세상이 변화하지 않고 영원하다는 생각)으로 보고, 또 현재의 즐거움에 탐닉하고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서, 도를 논하고 있으니,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4] 오쇼 라즈니쉬의 궤변


  불교는 생노병사 (육도윤회) 전체에 걸쳐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을 불교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인데, 오쇼는 오직 불교는 죽음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두무지 한 때 20세기 영적 지도자라고 자차하던 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고 편협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이와 같이 라즈니쉬는 불교의 진수도 모르면서 불교의 보석 같은 진리의 경전인 법구경을 자신 의 쾌락주의, 현실 탐닉주의, 나체주의와 프리섹스 주의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파렴치범의 극치이다.

  불교의 이치인 “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짓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욕망을 억누르지 말고 자기 멋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오쇼 라즈니쉬는 < 이 세상의 괴로움의 원인이 자신의 이기적이고 무한한 욕망 때문에 일어난다는 진리>를 보려고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직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오토를 궤변가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 지구상에 오쇼 라즈니쉬 같은 혹세무민하는 자가 나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

    

<< 참고로 이글을 적을 당시 필자는 사명감에 넘쳐 있었으므로 글이 좀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이점을 양해해 주시고, 혹 라즈니쉬를 공부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의 오류가 있으면 지면을 통해 반박해 주십시오. 겸허하게 배울 것은 배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