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실용주의자
◇ 실용주의자~ 붓다
● 바라나시 사슴동산에서 초전법륜에 성공한 직후, 붓다가 최초의 다섯 수행자와 야사스, 그 친구 등 61명의
대중들에게 행한 최초의 분부이다.
“ 전법하러 떠나가라, 많은 사람들의 선(善)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신(神)들과 사람들의 이익과 선(善), 행복을 위하여~.” (SN4.1.5)
위 전도 선언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불교의 목적은 “만인 행복”을 위한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48년간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대중 속에서 만인들의 고통을 상담하고 그 원원과 치유법을 명쾌하게 제시해
주었다.
붓다는 결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민중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해결하려는 자비로운 봉사자요,
실용주의 자였다.
● 쌍윳다니까야(잡아함경)에는 하늘神과 붓다의 문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늘신> 무엇이 나그네의 좋은 벗입니까?
무엇이 집에 사는 좋은 벗입니까?
무엇이 도움이 필요할 때 좋은 벗입니까?
무엇이 다가올 인생의 좋은 벗입니까?
<붓다> 대상(隊商)들이 나그네의 좋은 벗이고
어머니가 집에 사는 좋은 벗이고
동무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거듭거듭 좋은 벗이고
스스로 쌓은 공덕이 다가올 인생의 좋은 벗이라네.
<하늘신> 무엇이 사람들의 의지처입니까?
무엇이 이 하늘아래에서 가장 좋은 벗입니까?
무엇이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을 지탱하는 神입니까?
<붓다> 아이들이 사람들의 의지처이고
아내가 이 하늘아래에서 가장 좋은 벗이고
비의 神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을 지탱하는 神이라네.
● 불교에서 깨달음(견성)이란?
견성(見性)이란 눈 뜨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견성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체험되고, 이해되는 깨달음이어야 한다. 즉 본질적으로 일상적인 삶의 문제이다.
일상을 보는 방법은 이 세상을 연기나 중도나 무아적인 관점에서 바로보고 관찰하는 것이며,
만일 고통스러운 문제가 발생하였다면~
먼저 정신 차리고 문제의 상황과 원인을 잘 살펴보고, 본마음으로 돌아가 서로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깨달음이고 견성열반이다.
그 동안 불교는 <해탈이나 깨달음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 허구에 너무 빠져있었다.
<한 소식> 을 얻으려고 홀로 10년간 면벽하고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옛날 보다 더 이기적이 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는 수가 많다.
이제 불교도 각성해야 한다. 이웃이 고통에 쌓여 있는데, 이를 외면한 체 산속에서 <장좌불와 하는 것만이
유일한 불도 수행의 길>이라 하는 주장은 이제 그만 해야 하지 않을까?
깨달음은 누구라도 쉽게 이룰 수 있어야, 종교로서 가치가 있다.
보라~ 부처님 당시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담마를 듣고 즉시에 해탈한 사람이 수십만에 달한다.
그 당시 깨달음이란 담마를 이해하고 그것을 생활속에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것이 소승불교의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의 유식사상 내지 공사상으로 가면서 너무 추상화 되었다.
이렇게 깨달음이란 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또 신비의 대상으로 만든 것은
또 하나의 허위의식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이제 부처님의 생생한 깨달음의 현장인 초기불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시대의 혼돈을 그 명확하고 진솔한
담마로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불교의 담마인 연기법, 중도의 원리, 무아의 원리만 명확히 알고 이를 실생활에서 경험하고 실천하여,
많은 대중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이 한 몸 봉사하는 것이 진정 깨달음이 아닐까?
<자료출처: 초기불교개척사/ 김 재영 저 /도서출판 도피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