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불교와 경전의 성립
◇ 목차
1. 서론
2. 본론
[1] 인도불교 교단의 변천
[2] 근본(원시)불교
(1)부처님당시 설법
(2) 1차 결집
(3) 2차 결집
(4) 3차 결집
(5) 스리랑카불교
[3] 대승불교
3. 맺는말
===================================================================
1. 서론
- 경전이란 불교의 경(經)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통 경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수트라]라고 하는데 불교 뿐 만아니라 인도철학의 거의 모든 학파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좁은 의미로 경이란 간단한 산문으로 이루어지 “중요한 말씀을 모은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이라 할 때는 경장, 율장, 논장을 다 포함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넓은
의미로서의 경전이라 하겠다.
- 경전의 성립은 인도 불교의 역사적 산물이므로 먼저 인도불교의 교단사를 역사적으로 고찰한 후 그와 더불어 경전의 성립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원시불교와 대승불교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한다.
2. 본론
[1] 인도불교 교단의 변천
(1) 근본불교 시대
- 불교교단의 모든 문제는 석가모니부처님 입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부처님 입멸 후 교단은 구심점을 잃고 비탄에 빠지게 되었다. 다행히 가섭, 아난, 우바리 등 수제자들의
힘으로 부처님의 말씀이 합송이란 형식을 통해 정리되었다. 이를 결집이라 한다. 일종의 경전편찬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입멸 후 100년간은 이런 제자들의 힘이 남아 있었을 때였으므로 교단은 질서가 유지되었다. 이 시대를 근본 불교시대라 한다.
(2) 부파불교 시대
- 부처님 입멸 후 100여년이 지나면서 규율(계율)에 대한 미묘한 차이를 보이면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즉 계율을 액면 그대로 지키려는 보수적인 비구와 개방적이고 진보적인비구들 사이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 근본분열에서는 보수적인 상좌부와 개방적인 대중부로 대립되었다. 그 후 상좌부는 10개, 대중부는 8개의 부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3) 대승불교의 흥기
- 대승불교란 큰 수레를 타고 가는 불교란 뜻이다. 대승불교의 태동은 기원전 1세기경에 당시의 불교적 시대상황을 개탄하고 참 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대중부 계통의 어느 부류에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불교는 부처님의 교의를 제각기 해석하여 각 부파별로 경, 율에 대한 수많은 논서가 나왔다. 그래서 너무 전문적이어서 대중과는 너무 동 떨어져
대중들을 선도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교단은 더욱 은둔적이고, 소극적이 되어갔고, 대중들로부터 차츰 외면을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심한 교단을 보면서 뜻있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2] 근본(원시)불교
원시불교란 석존입멸 후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까지의 근본불교시대를 말하며, 또한 근본불교의 맥을 이은 스리랑카를 비롯한 남방불교계통의 경전이 여기에 속한다.
오늘날 남방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팔리어로 된 경전 속에서 원시불교의 내용을 알 수 있다. 팔리어경전에 대한 연구는 19세기말 유럽에서 활발히 이루어져 법구경을 비롯한 많은 팔이어 경전이 번역되었다.
특히 원시불교에는 대승불교에 비하여 부처님의 직설에 보다 가깝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원시불교에 대한 경전인 팔리어경전에 대하여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1) 부처님당시 설법
-기원전 624년 부처님이 인도에서 탄생하여 성불을 이룬 후 기원전 544년에 입멸하기 전까지 48년간 전법을 하였다. 이 때는 부처님이 생존해 있으므로 별도로 경전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 이 당시 석존이 사용하였던 언어는 갠지스강 중류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 되었던 마가다어로 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것은 보다 많은 대중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으로 바라문들이 그들의 경전을 독점하기 위해 어려운 베다어로 암송하는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2) 1차 결집
그러나 부처님이 입멸한 직후 500명의 비구가 비탄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한 늙은 승려가 “잔소리하는 대사문이 사라져서 얼마나 속이 후련한지 모르는데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마하가섭이 석존의 다비식을 마친 후 부처님의 가르침인
정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정법”결집을 요청하였다. 그 후 왕사성 교외에 칠엽굴에서 500
명의 아라한이 모인 가운데 마하가섭이 의장이 되어 회의를 하였다. 이때 아난이 부처님
설법을 외웠고 교단의 규칙은 우바리존자가 외웠다. 이것이 바로 경전의 시초이다.
◇ 1차 결집 시 사용한 언어는 마가다어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석존시대이후로 경전은 구전이나 기억으로 전해진 것이며 문자로 씌어 지지는 않았다. 경전을 구전하는 풍습은 불교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었고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불교보다 1,000년쯤 전부터 성전을 가지고 있던 정통바라문교는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수천
년 동안 기억을 통해서 경전을 전해 왔다.
(3) 2차 결집
부처님 입멸 후 100년 뒤에 베살리에서 열린 제2차 결집에서 석존이 제정하였던 계율에 대하여 자유롭게 해석하려는 혁신파와 예로부터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려는 보수파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보수파는 700명의 아라한을 집결하여 종래의 순수한 가르침을 전파하고자 결집을 행하였다. 이에 자유파는 별도의 집회를 열고 자신들의 경전을 편집하였다. 그리하여 보수파는 상좌부가 되고 자유파는 대중부가 되었다. 보수파에서는 경전은 구전으로 암송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4) 3차 결집
부처님 입멸 후 200년후 인도에 강력한 아소카 왕이 등장하였는데, 이 왕은 상좌부 불교를 믿어 법으로써 국가를 다스리는 것에 전념하여 불교를 보급하고 발전하는 데 심혈을기울였다. 이 시기에 불교교단에도 삿된 교리나 학설을 주장하는 자가 많이 등장하자 올바른 불교를 확립하고자 1,000명의 아라한이 수도인 파탈리성에 모여 제3차 결집을 개최하게
되었다. 이에 아쇼카왕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경, 율, 논 3장이 결정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성문화가 되었다. 이것이 스리랑카로 전해져 오늘날 남방불교의 기초가 되었다.
◇ 아소카 왕 전후 무렵부터 분열되기 시작한 불교교단은 18부 또는 20부의 부파불교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각 부파에서 경전이나 계율을 각각 다르게 이해한 점도 있으며, 또한 인도의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어가는 과정에 각 지방의 민중어로 옮겨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8세기경 이슬람 세력이 인도에 들어오기 전 까지는 인도전역에 불교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
(5) 스리랑카 불교
인도의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래된 후 기원전 1세기 종래의 순수한 大寺외에 자유주의적인 無畏山寺가 세워졌다. 이 두 파의 대립으로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보존하기위하여 상좌부에서 경전을 서사하였다.
4세기에 이르러 대사파와 무외산파의 세력 다툼이 정점을 달하고 이후 500~600년간은무외산파가 우위를 차지하였다.
12세기 팔라카마라왕이 타락한 무외산파를 숙정하고 대사파 교단을 국교로 인정하였다.
◇ 4차 결집
- 불교의 숙정으로 대사파가 전한 순수한 경전이나 주석서를 1,000명의 아라한을 결집하여 제작하였다. 스리랑카에서는 경전이 팔리어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미얀마를 비롯한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서는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고 있으며, 경전도 팔리어(중기 인도아리아어의 일종)로 그대로 전승하고 있다.
◇ 16세기 이후 인도가 서양인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불교도 수난의 시대로 들어갔다.
◇ 19세기 말엽 스리랑카에 “구나난다”라는 한 영웅적인 청년이 나타나 점차 사라져가던 스리랑카의 불교를 부활시켰다.
[3] 인도의 대승불교
- 대승불교시대에 이르면서 경전을 서사하는 데 대한 공덕을 크게 칭송하게 되었다.
◇ 원시불교나 부파불교에서는 출가와 재가를 엄격히 구분하였고, 출가자는 오로지 불교에만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경전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며 설하거나 수행한다. 그러므로 출가자가 있는 한 (교단이 존재하는 한) 경전을 서사할 필요가 없었다.
◇ 서기 200년 무렵 대승불교 시대가 되면서 경전을 서사하는 공덕이 크게 칭송 된 이유는 재가불교를 표방한 대승불교에서는 처음에는 출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계자를 양성하는 기관이 없었던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지 독송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 후세로 내려오면서 대승에서도 출가자를 배출하여 전문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유명한 대승의 지도자인 용수, 무착, 세친 등은 모두 출가자였다. 그래서 뛰어나 대승의 가르침을 후세에까지 남겨주고 민중에게 널리 전할 수 있을까가 큰 문제였다. 그 결과 생각해 낸 것이 경전을 서사하고 읽고 외워서 설하는 공덕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금강반야경”, “법화경”에서도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 이 대승불교의 경전은 인도 북부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북 인도에서 6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북부계 범자인 실담문자로 주로 네팔에서 사용하던 문자였으며, 당나라 때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 전해진 경전은 모두 실담문자로 되어있다.
3. 맺는말
경전이란 불교의 경(經)을 가리키는 말이며, 부처님의 말씀을 모은 책이다. 부처님 입
멸후 경전은 문자로 전하지 않고 구전으로 암송되었다. 그러다가 불교가 분파되어 감에 따라 상좌부불교를 지키려고 한 의도에서 만든 경전이 지금 팔리어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한 대승불교의 이념과 실천을 위하여 대승경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태동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원시불교나 대승불교 모두 경전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성에 기인한 것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학도의 입장에서 이러한 역사성을 알고 원시경전인 팔리어 경전이나
대승경전을 공부하면 보다 폭넓은 시야를 갖게 될 것이다.